구원과 정의

2009/06/27 12:24

어떤 자가 구원을 받을 있을까? 이는 기독교인이라면 교회를 번이라도 다녀본 사람들은 인생에서 적어도 번은 고민해본 문제가 아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줍니다. 로마서 14장은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지훈 / 탤런트,국내배우,뮤지컬배우
출생 1982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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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카페 (공식) 세계를 정복할 배우 주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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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 마약, 외도, 도박, 동성애를   자는 구원을 얻을 없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실 구원은 이런 것과는 관계가 있습니다. 진짜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은 온통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애타게 설명했던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화와 기쁨을 추구하는 자(14:17)가 구원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살면서,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으며 살면서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이되느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어른이 되면 법률 없이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순서가 바뀌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담배, 마약, 외도, 도박, 동성애 등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하면 구원을 받는 아니라 이런 것들은 그저 구원을 받은 자가 자기도 모르게 질서(사회, 건강 등) 위해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judge me now,   #2 in explore
judge me now, #2 in explore by ashley ros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우선입니다. ' 믿겨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믿겨집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겨집니다. 은혜로 믿을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세상의 엄청난 정보 홍수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 그의 , 그의 행동 등이 믿겨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겨지는 것은 세뇌의 결과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게 됩니다. 희한하게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믿겨집니다. 기적입니다. 그게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방탕한 삶을 살아도 이상하게 그리스도가 주인이심이 믿겨진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믿겨지는 것은 오직 본인과 주님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데 그렇게 사냐?' 질문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2절과 3절에 그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교회 생활 20년을 해도 자라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계속 입으로 씹어서 넘겨준 이유식만 받아먹은 결과입니다. 그래도 그분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다면 구원은 그의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댓가없는 선물로 것입니다.


Martyrdom of St Paul
Martyrdom of St Paul by Lawrence OP 저작자 표시비영리

구원의 결과는 자유입니다. 자유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다른 이들도 자유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나다. 질서가 무너지면 하나님을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관점을 갖고 로마서 14장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 담배, 마약, 외도, 도박, 동성애 등등에만 너무 집중하며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것을 해도 부모는 어떻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이런 행동을 한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부모되심, 그리고 그가 우리의 주인이 되심을 알게 되는 , 그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입니다. 구원과 정의는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붙어 있습니다. 공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출발은 역시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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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8절부터 10절까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 사랑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편지를 사도 바울은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0).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인 같았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느낌이 듭니다. 사랑하면 생각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니 더욱 그런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나옵니다.

느낌이 어떻습니까? 수동적이죠. 능동적으로 나가서 사랑을 베풀고 그러는 아니라 안에 있는 내면 세계를 돌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고든 맥도날드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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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세계를 돌봐야 사랑이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서 1310절에 나오는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표현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보통 능동적인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대표적인 사랑 같은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사랑보다는 정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같습니다.

물론 사랑이 있어야 정의도 구현할 있겠죠. 그런데 사랑은 내면 세계에서 마음을 돌봐야 생기는 같습니다. 말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사랑은 나를 절제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이웃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사랑과는 조금은 다른 차원인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과 정의를 혼합해서 생각했던 같아요. 사랑은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행위로 나오는 아님을 있습니다. 행위는 사랑을 기본으로 정의로운 일을 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입니. 로마서 1310절과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연히도 같은 13장에 있네요.

사랑은 내가 가서 손을 뻗치는 아니라 내면 세계에서 발생하는 죄된 나를 다스리는 것에서 시작함을 있습니다. 내면 세계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사랑을 없는 같습니다. 내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묵상 생활입니다. 나를 봐야 내면 세계가 보이는데 조용한 가운데 묵상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바쁜 가운데에서는 나를 없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 나를 따르라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엘리자베스 라움 (좋은씨앗,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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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히틀러를 암살하는데 동참했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와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뒤집었던 예수님은 이웃에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닌가요? 이런 질문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인데 그들은 그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히틀러는 우리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악을 조장하는 거대한 파워였습니다. 개인이지만 그의 영향력과 존재는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악이었습니다.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던 이들을 놀라게 했던 약간은 폭력적인 예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썩어 빠져버린 것은 어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 전체의 악으로 봤기에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도 무례히 행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을 생각해 봅니다. 공동체나 어떤 집단이나 국가에서 악을 조장하는 자들을 간단히 이웃으로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배포한다든가, 불법 도박을 조장하는 자들을 단순히 이웃으로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테러를 하자는 것은 아니구요, 그들이 이상 악을 배포(?)하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도록 힘을 모아야 하고 신고도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악을 조장하고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례히 행하는 아닙니다. 피해를 끼치는 아닙니다. 이유는 그들은 행위에 대해서는 이웃이라는 칭호를 받을 없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
출생 1926년 1월 6일
신체
팬카페 김대중 선생님을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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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현대사에서 역할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게 달러를 엄청나게 갖다준 것은 악을 조장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일입니다. 그들의 권위와 권세는 인정하되, 잘한 부분은 인식하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고치고자 하는 국민적인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정의인 같습니다. 사랑을 때는 이웃인지 아니면 이웃차원을 넘어선 악의 중심인지를 필요가 있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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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쟁이
    2009/06/25 07:1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무엇인지 감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글로 쉽게 정의 내리는 귀한 은사가 있으네요...감사드립니다.
    • 2009/06/26 00:33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아 감사합니다. 격려의 말씀으로 알고 더 생각하고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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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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