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용사 벡터맨
채널/시간 챔프 방송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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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 국내배우
출생 1973년 5월 23일
신체 키185cm, 체중72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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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라는 배우가 과거 '벡터맨'으로 출연한 것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벡터맨'은 지구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읽으면 정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수십 번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정의는 영어로 Justice입니다. 히브리어로는 Tsedaqah (쩨다카)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초로한 정의를 설명드리고자 하기에 히브리어 원어인 “쩨다까”가 무엇 의미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쩨다까‘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Justice),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정의(Justice)‘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Justice라는 단어는 성경에 1천 회 이상 나오는데 대부분이 ”쩨다까“에 속한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정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비해 수십배 더 자주 성경에 등장한다고 하니 하나님이 ”쩨다까“를 얼마나 중시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시 하셨다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의’하면 ‘나쁜 사람과 대적해 싸우는 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벡터맨' 수준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의에 대한 메시지는 주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저 악한 무리와 싸우는 일이 목표이면 결국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아주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폭력적인 정의로운 일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정의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고용주는 이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거의 노예 부리듯이 합니다. ‘정의’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근로자들을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의를 실현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면 둘 다 이뤄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저 상호간에 감정만 더 상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폭력적인 저항, 평화적인 저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 선생,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함석헌 선생 등은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 당시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군사 정부를 항복하게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3.1 운동이 바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저항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최대한 시도해보고 협상과 모든 것이 막혔을 때 마지막 카드로 들고 나오는 것이니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나서면 그것은 진정으로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From the Pulpit
From the Pulpit by danny.hammontre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예를 들어, 히틀러 암살단이 조직된 것은 비폭력적 저항마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쩨다까”이고 이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 커뮤니티를 회복하는 정의’라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상황에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부정’과 싸워야 합니다. 근로자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이를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고 이들이 다시 해당 업체에서 일하고 경영진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저항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끊임없는 대화와 여론 조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평화 시위를 자주 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속박에서 벗어남’과 ‘회복’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잊고 감정적으로 대처할 경우 ‘정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의 사도 벡터맨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지혜로운 "쩨다카 맨'이 필요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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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40장22절에는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메뚜기와 같다"(표준새번역)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읽는데 영화 '앤트 불리(Ant Bully)'가 생각났습니다. 그런 메뚜기와 같은 존재를 그렇게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가 앤트불리입니다.

이 영화를 본 후 쓴 감상문을 잠시 소개합니다.



앤트 불리(Ant Bully)는 3D로 제작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3D로 볼 경우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화는 그 자체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만화 영화의 주인공인 루카스는 외톨박입니다. 루카스는 골목대장이 놀리고 괴롭히면 마당에 있는 죄 없는 개미집을 망가뜨리며 분풀이를 하곤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작은 개미가 되고 맙니다. 저는 이것을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의 세계로 가서 그들의 어려움을 현장 체험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카스는 개미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힘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개미들을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지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인간이 개미를 괴롭힌다는 차원을 넘어 이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이 힘 있는 자들에게 개미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파워를 가진 자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파워의 달콤함임과 동시에 타락의 전조인 것입니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이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남다른 교훈을 얻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얻는 교훈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상처와 아픔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도 보게 됩니다.

위 내용은 제가 몇 년 전에 영화 감상문을 적은 것인데 당시에는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약함을 보며 마음을 함께 하는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최근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앤트 불리가 생각났을 때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됐습니다.

인간에게 작게 보이는 개미와 하나님께 메뚜기처럼 보이는 인간을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루카스가 개미의 세계로 들어간 상황이 마치 예수께서 이 인간사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메뚜기처럼 본다고 했는데 그 메뚜기가 되어 살다가 그의 나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는 개미가 된 루카스보다 더 작아짐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처럼 보였던 인간의 세상에서 오셔서 고통을 대신 받는 내용은 이사야서 53장에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그러한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몇 백년 전에 그러한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4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표준새번역)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심은 이미 오래전에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겼던 인간을 위해 하신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몸으로 인간사에 자신을 던지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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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9장에 보면 갈릴리에서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오실 왕은 평화의 왕이요, 영원한 아버지요, 강한 하나님이요, 놀라운 멘토라는 내용이 9장에 소개됩니다.

너무나 명백한 예수 탄생의 예언 부분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이미 기원전 750년 쯤에 예언이 됐던 것입니다. 97절에 보면 앞으로 태어난 그분은 영원한 평화와 공의와 정의를 가져올 분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모스서도 보면 하나님은 불의하게 돈을 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화가 나 있으십니다. 가난한 자를 등쳐서 부를 챙기는 자들에 대한 화가 그들에게 미칠 것을 예언자 아모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아모스서 그리고 신명기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공의의 하나님이요, 가난한 자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요, 평화를 가져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유다 땅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땅은 공의와 정의가 없이 자유경제주의의 이념 아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깊어지고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서 521절에 나는 너희의 종교 잔치를 싫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은 채 드리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521-24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너희들 노래소리, 제사 지내는 것, 헌금 다 필요 없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98 / 미국)
출연 톰 행크스, 톰 시즈모어, 에드워드 번즈, 맷 데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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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원어에 보면 공의라는 말은 어려움에 빠진 이를 건져내는 일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됩니까. 그렇지만 구해내려는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어려움에 빠진 인류, 어둠 속에 있는 인류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은 비효율이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한 일입니다. 군림하며 모든 이를 회심케 한 게 아니라 희생하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성주의 사회에서는 비효율은 바보짓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여기저기에 공의를 강조하시며 바보짓을 하길 원하십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어려움에 빠진 이를 건져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더 높이 오르려고 하고 더 많이 챙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의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면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그냥 지나친 자들이 효율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내것 챙길 것 다 챙기면서 공의를 이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나의 희생과 손해가 있어야 공의가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우주의 창조자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공의는 결국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손해를 보게 되고 손해보면서 어려움에 빠진 자를 건져내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자녀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 목숨을 생각하겠습니까. 사랑하기에 수영을 못해도 물속에 뛰어들게 됩니다.

장진영 / 국내배우
출생 1974년 6월 14일
신체
팬카페 장진영 공식 팬클럽 J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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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 씨의 남편이 손해를 보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곧 죽게될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그는 장진영 씨의 가족과 만나 모든 재산이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사랑과 공의는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손해를 감수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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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ye
Comfort ye by rogiro 저작자 표시비영리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밝은터]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1)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기원전 약 750년 경에 강성한 나라를 이뤘습니다. 강성한 두 나라에 대해 농부 선지자인 아모스와 전문 선지자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이사야서와 아모스서를 읽으면 Says the Lord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들 선지자에게 한 말씀을 그들이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 분인지 그분은 어떤 분인지에 대한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염려하며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는 힘을 싫어하고 선량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자들을 혐오하는 분입니다.

재미난 사실은 두 나라는 종교적으로는 풍성한 나라입니다. 종교적인 예식이 이 두 나라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선지자는 이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노여움을 두 선지자가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공의를 원하는 분입니다. 은혜와 자유 속에서 질서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서 115절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하는 짓이 혐오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공의를 구하고, 압제된 자를 구하고, 고아를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회에서 눌린 자, 힘이 없는 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인생 자체가 죄로 가득하지만 그러한 공의를 구하는 자의 죄는 눈처럼 희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서에서도 하나님은 농부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고 계십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들에게 불을 내리겠다는 메시지를 아모스를 통해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과 행동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혼내주는 게 핵심이 아니라 혼나기 전에 생각과 행동을 바꾸라는 일종의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난 후에 행동을 바꾸죠. 벌을 선 후에 행동이 수정됩니다. 그 전에 바꾸라는 경고는 어떻게 보면 사랑입니다.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계속 간섭하는 것입니다. 흑돼지를 치는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흑돼지를 낮에는 방목해서 키우고 밤에는 축사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분이 방목을 하면서도 저녁 시간이 되어 축사로 들어오는 어떤 음성 신호를 보내면 흑돼지들이 말을 너무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했기에 그게 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말씀이 아닙니다)을 듣고 알게 된 아이들은 커서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아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보다는 대중 문화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쏟아내는 잘못된 메시지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온통 연예인들 이야기이고 연예인들의 훈훈한 이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내용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내용에 대해서는 칙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용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는 프로그램의 '단비'는 공익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놀랍고 놀라운 프로그램입니다. 김영희 PD는 아모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인터넷, 대중문화, 언론을 뒤덮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질투와 미움이 대중문화의 주요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묵묵히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 풍요 속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자리 싸움, 교리 논쟁, 교단 편가르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종교는 있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뜻은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이사야와 아모스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소위 말하는 전문 사역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농부였던 아모스를 쓰셨던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일들이 줄어들어야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2장에는 우리에게 화나나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화해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더라도 그것을 눈처럼 희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것을 알면 구속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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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e Yang
    2010/06/05 10:0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24절-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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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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