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교회에서는바울이칭찬을많이하고덕담을자주합니다. 물론덕담만있는것은아닙니다. 성숙한교회가더성숙해질수있도록권면의내용도있습니다. 그러나미성숙한교회에대한권면과는크게차이가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Hell Awaits You! by danny.hammontree[하나님은 여기 적혀 있는 자들에게도 천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죽는 날까지 주십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9절-10절)
이 내용이 나온 후에 11절에는 다음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위와 같은 행동을 했던 분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고린도 교회에 6장9절과 10절에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통해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전체를 살펴보면 지금 고린도 교회는 6장9절과 10절에서 묘사하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혼란스러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혼란에서 질서를 잡아주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9절-10절만 보면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지금 고린도 교회의 교인으로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도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사도 바울은 이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전에 이렇게 지냈던 새로운 신자들이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영향'이라함은 도덕적인 영향보다는 다른 신을 섬기도록 하게 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6장9절-10절에 나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종교의식으로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종교 의식 중에 그러한 행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고린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다시 과거로 돌아갈 어떤 접촉점이 있다면 좋지 않은 것이겠죠. 바로 그것입니다.
6장9절-10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용서못할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용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다른 신을 섬기도록 하는 성향이 있기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 멀리하기를 사도 바울은 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과 사귀기를 거부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였기에 그들과의 사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럴만한 믿음이 굳세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 계속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나 어떤 믿음의 모임이 성숙해져있다면 6장9절과 10절에 나오는 분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하지만 성숙도가 낮다면 철저히 배제하도록 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6장12절에서 모든 게 가하지만 모든 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자유와 질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자들에게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있습니다. 모든 게 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유라면 유익하지 않고 구원의 기회가 점점 좁혀지게 됩니다.
당시 창녀 또는 남창들은 성행위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의식을 했다고 합니다. 성행위는 종교적인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미국(또는 한국) 사회를 봅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9절-10절)
이 말씀과 미국을 보면서 보통 드는 생각은 “미국이 이런 자들에게 너무 관대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너무 미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고전 6장9-10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체로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다른 신이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율법의 신을 섬깁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아닌 율법을 섬깁니다. 우리는 유명한 목회자를 섬깁니다. “OOO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야”라고 말하며 그의 말이 하나님 말씀처럼 탈바꿈합니다. 대형 교회를 섬깁니다. “OOO 교회에서 그걸 했으니 우리도 하자!” 대형 교회가 하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또한 성취의 신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성취하게 하셨다고 자랑을 늘어놓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6장9절-10절에 나오는 사람들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어떤 요소가 지금 교회 안에,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머니, 섹스, 파워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보다 머니가 더 좋고, 하나님 나라보다 섹스가 더 좋고, 하나님 나라보다 파워가 더 좋으면 그게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파괴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해결해야 할 질문입니다.
100m 달리기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습니다. 100m 달리기를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비유를 로마서 앞에 장에서 나눈 바 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을 끊고 달리면 영광, 환난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0m부터 100m까지 별의 별 일을 다 겪습니다. 달리는 중간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죄를 지음),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병에 걸림),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끝까지 무사히 잘 달릴 수도 있습니다. 피니시 라인까지 가는 중에 환호를 받게 됩니다. 영광이 분명 있습니다. 박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끄러지면 어떻게 합니다. 다시 출발선으로 가서 달리기를 해야 합니다. 다음 경기가 있듯이 다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믿음으로 출발한 이의 최종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든 피니시 라인을 향해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한 이는 영원한 생명이 이르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목적지는 너무나 명확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쓰러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결국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있어도 죄는 짓는다
이 비유를 마음에 품고 로마서 6장을 읽으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분명 죄를 짓습니다. 중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 출발한 자와 다른 점은 믿음으로 다시 출발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출발한 자는 넘어지는 것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계속 넘어져도 무감각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같이 넘어졌는데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같이 넘어져도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노예로 있는 자와 의의 종으로 있는 자의 다른 점입니다.
의도적인 죄인?
넘어져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 의도적으로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잘 뛰면서 피니시 라인을 잘 통과하려고 합니다. 아무렇게나 뛰려고 하는 사람은 죽은 육상선수입니다. 죄 아래서 죽은 자와 같습니다. 대부분 육상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뛰려고 합니다. 특히 믿음을 가진 자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뜁니다. 그래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잘 뛰었는데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레이스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비유가 잘 이해가 되십니까?
정리를 하면 100m 달리기를 할 때 아무렇게나 뛸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마음 놓고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열심히는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보다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하나님의 의를 품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립니다. 아무렇게나 뛰는 사람은 중간에 넘어지면 레이스를 그냥 포기합니다. 열심히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은 자는 다시 출발점으로 가게 되어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출발과 과정과 마무리가 모두 다릅니다. 겉모양은 같아 보이는데 내막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자
오늘 사도 바울이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믿음으로 출발한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은 자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습니다.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에는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가는 사람입니다. 중간에 실수도 있고, 죄도 짓고, 넘어지고, 영광도 있고, 박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방향성이 너무 정확합니다.
자, 여기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결론 짓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서 6장23절).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그의 은혜를 깨닫는 것, 그가 보내신 이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00m 달리를 하는 중에 겪는 경험은 믿음으로 출발한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내면에서 다른 게 분명 있습니다.
적용
나는 100m 달리기를 하면서, 중간에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영광의 박수를 받기도 했고, 욕을 먹기도 했고, 부상도 당하기도 했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다. 나는 다시 믿음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믿음.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믿음. 또 넘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선다. 나는 빛의 자녀이니까.
Think Deeper
진리도 마찬가지다. 오직 진리를 따를 때에만 진리를 알 수 있다. 쪼개고 따지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오히려 진리를 진리답지 못하게 한다. 진리는 확고하고 장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로 부르지 말고 우리가 직접 진리를 향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정의하려고 시도한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