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Cross
Through The Cross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끼고 기쁘게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인 교회라 사도 바울의 특별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는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세운 교회로 보여집니다. 가지 다른 상황을 보면서 그가 어떤 관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문제가 가득한 혼란의 교회(고린도 교회) 향해서 그는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더욱 깊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였기에  일반적인 교리와 권면이 주를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깎아내리며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울이 세운 교회였더라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같은 강한 어조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신학교 교수가 모르는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유대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를 모두 혼합했다고 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실제 골로새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엿보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런 지경이면 그는 감정이 섞인 투로, 길고 장황하게 글을 썼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그렇게 썼다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점잖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같습니다.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경을 읽을 성경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교류됐던 편지글을 읽는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멘토였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내가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더라면 어떻께 썼을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오래전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바울) 읽는 (골로새 교회 교인) 그리고 글을 엿보는(?) (성경 독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재범 (박재범)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4월 25일
신체 키174cm, 체중60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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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M 재범 군을 생각합니다. 마이스페이스라는 블로그에 친구와 사적으로 대화 나눈 어렸을 때의 글에 한국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것은 재범 군이 썼던 일종의 전자 편지 글은 친구에게 쓰는  사적인 글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미성숙했던 10 중반의 어린 아이가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읽도록 사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인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인 편지라고 있습니다. 편지글이 정경이 되어 성경이 됐을 우리는 사적인 편지글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마구마구 잡아넣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역사적인 기독교 선교사가 인물입니다. 그의 미성숙했을 때의 행동이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로서 선교일을 있었습니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적인 편지글을 성경 66권에 넣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할 있는 근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교회에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그대로 옮겨서 적용할 경우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진리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우리 교회에 해석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글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당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뜻을 헤아리면서 해석한 내용을 전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자유케하지 않지만 진리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 , 행동을 갖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매도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미성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어 그가 사도로서 일을 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지적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그의 회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의 과오가 용서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 있던 사도가 사적인 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실(facts) 보던 눈에서 진실(truths)이 발견될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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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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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365: SILENCE = DEATH
293/365: SILENCE = DEATH by malik ml williams [flickr-ing in and out] 저작자 표시비영리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 글을 쓰는 밝은터에게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하나님의 성품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주인공의 성품을 모른 채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면 전체 내용 파악을 하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 자유,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마음에 품고 성경을 읽을 때 오해가 덜 생깁니다.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은혜, 자유, 질서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강조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질서를 많이 강조하는 듯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니까 그런 어조로 편지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은혜와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와 자유가 적절하게 포함됩니다.

신명기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질서가 강조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예수님을 초대하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명기 설교의 상황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은혜와 자유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숨겨진(?)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 무서운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되면 메시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신명기 24장에는 여러 규정이 나옵니다. 이혼은 제한적으로 허용됐지만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 원래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일이었으며, 갓 결혼한 사람은 군복무에서 제외되며, 유괴범은 사형에 처하며, 문둥병에 따르는 의식이 있어야 하며, 적시에 품삯을 지불해줘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둬야 할 이삭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을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그대로 적용하면 어떨까요?

이 규정에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입니다. 그리고 질서입니다. 첫째 남편은 여자에게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혼증서를 써줬습니다. 그리고 둘째 남편도 비슷한 사유로 이혼증서를 썼거나 사망을 했는데 이 여자가 첫 번째 남편에게 가는 것은 가증스러운(abhorrent) 일이라고 합니다. 21세기의 상황에서는 참으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가증스러운 것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를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하는데 첫 번째는 남편이 여자가 싫어서 이혼증서를 써줬는데 다시 맞아들이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가 다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일로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여자에 대한 보호입니다. 여자가 함부로 다뤄지지 않도록 하는 보호법으로 보입니다. 정결하지 않은 여자는 돌로 치라는 규정이 당시에 있었기에 자칫 잘못 그런 여자로 몰려 죽음을 당할 수 있기에 보호하려는 규정으로 보입니다.

갓 결혼한 사람이 군복무에서 제외되는 것은 지금 적용해도 좋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유괴범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조금 과하지만 유괴범이 법의 심판을 확실히 받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머지 품삯을 적시에 주는 것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남기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계속 적용되어야 할 성경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유, 질서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연합을 꾀하며, 약자를 보호합니다. 또한 죄에 대해 은혜의 손길을 뻗칩니다. 교도소에 있는 분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칠 때 그들에 대해 은혜, 자유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을 당장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긍휼하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장동건3
장동건3 by Raymond.Kang 저작자 표시비영리

배우 장동건과 고소영이 사귄다는 소식이 한국 시각으로 어젯밤 자정 직전에 터졌습니다. 갑자기 터진 것에 의아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혈서 사건과 연관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영 찜찜합니다. 과거 연예인들의 사건이 많은 정치, 사회적 사건을 묻히게 한 것을 보면 왠지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로 보면 장동건과 고소영은 사귀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보면 그 사귀는 것이 왠지 정치적으로 이용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우연히 그런 것일수도 있고, 진짜 정치적인 어떤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실을 볼 때 진실을 볼줄 아는 눈과 정보를 갖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실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허락하심입니다. 수많은 사건이 사실을 제공합니다. 그 사건들의 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의 틀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무시하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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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1/06 02:0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상황과 사실과 진실 어느것도 놓지 말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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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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