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는 안티 기독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소수의 안티 기독 운동가들은 잠재세력을 자극해서 기독교 복음이 흔들리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안티 기독 활동의 시조는 사도 바울이었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바울은 예수의 제자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91절을 읽어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 다음으로 기독교 선교사 최고의 인물인 바울이 살기가 등등해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잠시 pause]



스테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는 장면에 대해 성경기자는 사울이 이를 마땅히 여겼다고 적는다 (사도행전 7:60).

바울의 안티 기독 활동은 오늘날 한국에서의 그것과 비교하면 잔인하다고 있다. 초기 기독교 태동 당시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50마일 ( 241km) 거리에 있는 다마스커스(다메섹) 피신한 상황이었다. 바울은 그러나 기독교인을 박멸하기 위해 그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에게 일종의 체포권 받았다. 이는 한국의 안티 활동에 비하면 엄청난 열정과 파워 아래에 행해졌다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후에 모든 상황은 역전됐다. 역사상 최악의 안티 기독이었던 바울은 역사상 최고의 기독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바울에게 세례를 아나니아나 그를 믿는 자들에게 소개한 바나바의 역할은 중요했다. 이들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안티 기독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던 인물인 바울의 회심을 주님으로부터 확인하고 바울이 전도 활동을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우리는 안티 기독 활동가였던 바울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있을까. 먼저, 우리는 안티 기독 운동가들이 삶의 근원인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 그들이 돌아올 경우 회심 여부를 분별할 있는 영적인 혜안이 있어야 한다. 아나니아와 바나바와 같은 혜안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우리 속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있을까. 오늘부터 세상의 안티 기독들을 주께서 직접 만나 주셔서 그들이 안티 기독 운동이 아닌 기독 운동에 적극 동참할 있도록 매일 일정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다. 돌로 맞아도 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7:60)”라고 했던 스데반의 영성을 닮아야 한다. 지금 기독교는 당시와는 다르게 파워가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영성이 필요하다. 힘으로 밀어낼 수도 있지만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짐을 연습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힘이 있지만 힘을 행사하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것을 적용할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기본으로 돌아가면 교회는 어떤 핍박과 박해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아나니아, 바나바, 스데반의 영성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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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기독의 시조는...  (0) 201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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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ow street; Mdina, Malta
Narrow street; Mdina, Malta by foxypar4 저작자 표시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가 아직은 어린 아이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른이지만 성숙이 교회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성숙 단계로 들어간 교회라고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 믿음과 인내로 여러 교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고 있습니다 (살후 1:4).

성숙한 교회에서는 바울이 칭찬을 많이 하고 덕담을 자주 합니다. 물론 덕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가 성숙해질 있도록 권면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교회에 대한 권면과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말이 같지만 상황을 알고 읽으면 다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교회마다 상황과 사정이 다르고 바울의 책망과 권면도 다른데 역시 그가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에 대한 소개가 핵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낮아짐) 부활에 관한 내용부터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의 심판을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아야하겠기에 바울이 사랑장(고린도전서 13) 포함한 같고, 빌립보 교회는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메시지가 필요했던 같습니다. 이단 문제로 골치 아팠던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함에 대한 내용이 필요했고, 재림의 임박성을 너무 열렬히 기대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의 오심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성숙한 교회인가 성숙하지 않은 교회인가에 따라 편지 내용이 크게 다름을 있습니다. 성숙함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미성숙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를 읽는 시점에 그 교회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는 질서가 잡혀야 했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고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양념을 넣듯이 했습니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은혜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했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다른 부분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거론된 교회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교회들입니다.

로마서는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게 다뤄졌기에 편지의 비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위에 소개된 바울의 편지글은 개인차원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는 , 따라서 내용을 21세기의 기독교 리더가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며 공동체적인 해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상황에 맞는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인 같습니다.

설교자는 교회의 상황에 맞는 본문을 골라 설교를 해야하고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듣는 아니라 공동체적인 해석을 하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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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질서를 강조했다고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이야기했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자유가 강조됩니다. 4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바로 질서, 은혜, 자유입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분열과 이방신 숭배, 이단 출몰로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질서를 먼저 잡으려고 했던 바울은 주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교회입니다. 신앙 성숙을 위해 계속 은혜를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 바울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장황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활동한 내용을 설명한 바울은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에 묶여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이들은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실 율법은 초등학문이 맞습니다. 성령은 고등학문이고 율법은 초등학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가 숨이 막혀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점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에 필요한 메시지가 갈라디아서 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갈라디아서 325).

하나님의 질서는 기초가 되고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가 서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기초는 잡혀 있다고 있습니다. 위에 자유를 세워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너무 율법주의적인 교회가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해석해서 강해로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은 율법을 무시하자는 아니라 율법의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야 세상과도 올바른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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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The Cross
Through The Cross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끼고 기쁘게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인 교회라 사도 바울의 특별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는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세운 교회로 보여집니다. 가지 다른 상황을 보면서 그가 어떤 관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문제가 가득한 혼란의 교회(고린도 교회) 향해서 그는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더욱 깊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였기에  일반적인 교리와 권면이 주를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깎아내리며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울이 세운 교회였더라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같은 강한 어조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신학교 교수가 모르는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유대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를 모두 혼합했다고 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실제 골로새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엿보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런 지경이면 그는 감정이 섞인 투로, 길고 장황하게 글을 썼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그렇게 썼다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점잖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같습니다.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경을 읽을 성경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교류됐던 편지글을 읽는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멘토였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내가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더라면 어떻께 썼을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오래전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바울) 읽는 (골로새 교회 교인) 그리고 글을 엿보는(?) (성경 독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재범 (박재범)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4월 25일
신체 키174cm, 체중60kg
팬카페
상세보기

2PM 재범 군을 생각합니다. 마이스페이스라는 블로그에 친구와 사적으로 대화 나눈 어렸을 때의 글에 한국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것은 재범 군이 썼던 일종의 전자 편지 글은 친구에게 쓰는  사적인 글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미성숙했던 10 중반의 어린 아이가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읽도록 사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인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인 편지라고 있습니다. 편지글이 정경이 되어 성경이 됐을 우리는 사적인 편지글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마구마구 잡아넣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역사적인 기독교 선교사가 인물입니다. 그의 미성숙했을 때의 행동이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로서 선교일을 있었습니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적인 편지글을 성경 66권에 넣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할 있는 근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교회에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그대로 옮겨서 적용할 경우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진리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우리 교회에 해석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글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당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뜻을 헤아리면서 해석한 내용을 전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자유케하지 않지만 진리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 , 행동을 갖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매도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미성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어 그가 사도로서 일을 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지적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그의 회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의 과오가 용서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 있던 사도가 사적인 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실(facts) 보던 눈에서 진실(truths)이 발견될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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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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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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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있을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저작자 표시비영리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같습니다. 118절에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땅에서는 낮아질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것을 꼭꼭 집어주는 조금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공감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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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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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장과 16(마지막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아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서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 예수는 그러한 심판을 통과해 부활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은 모든 논쟁의 정답을 주는 것입니다. 정답은 죽는 순간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찰나에 모든 게 결정이 납니다. 100m 달리기 선수가 10초 안에 달려야 하는 광속(?) 승부를 내듯이 죽음의 순간에 인생에서 우리가 쏟아놓았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후반부에 눈깜짝할 사이에 심판의 결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해결했다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또한 부활과 연관이 되고 부활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천국의 이미지를 갖도록 합니다 (15:49).

죽을 때 모든 승부의 결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견고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어도 죽음 앞에서는 그 이론이 무색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데 무슨 이론이 필요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온갖 혈기를 부리는 교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자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기본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15장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부활한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믿는 자도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크리스천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고 이에 대한 증인과 증거가 너무나 많기에(고전 15:3-9)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도덕성을 믿는 게 아니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길을 만드셨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이 도덕으로는 율법으로는 도저히 천국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이러한 은혜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에 대한 강력한 징표로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신 것이고 그 사건은 우리의 죄를 속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입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는 혼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미래에 우리에게 닥쳐올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전서 연재를 마치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연재였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고린도교회는 교회를 시작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미국과 한국도 교회를 시작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점점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과 부활을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세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 말에 위로가 됐을 것 같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알려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다른 이들도 함께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은혜와 자유를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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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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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 2009/11/06 23:59
      댓글 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스만이님..그리고 주님.

Obama Meets With His Economic Recovery Advisory Board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분을 섬기는 사람은 은혜, 자유, 질서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공동으로 알려고 하고 그의 성품 닮기를 공동으로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21세기 교회는 그러한 모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1세기의 고린도교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회는 21세기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나옵니다. 12장부터 14장까지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영적 은사와 사랑을 생각하지만 사도 바울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와 사랑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 자유, 질서 안에서 행해질 때 개인과 공동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자유, 질서의 하나님인데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성품을 완벽하게 이 땅에서 표현해낸 유일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은혜요 그 자체로 죄에서의 자유요 그 자체로 질서입니다. 그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질서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은혜, 자유, 질서를 생각하며 고린도전서 12장의 영적 은사를 읽으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이 잘나서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 그리고 공동체의 유익(질서)을 위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은사를 개인적으로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 것처럼 영적인 은사도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그런 개념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미국인은 조금 어렵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강하기 때문에 영적 은사가 개인적으로 받는 은사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인이 잘 이해하는 부분은 몸의 지체 중에 약한 것을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후반부). 한국인은 그것에서는 약합니다. 나영이에게 평생 쓸 배변 주머니를 제공한 곳은 미국 업체의 한국 지사였습니다. 그렇게 이슈화 되어도 정작 나영이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데 인색한 한국 사회입니다. 약한 자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1224절 말씀을 미국 사회는 비교적 잘 이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 비해서는 약간 낫다는 말입니다.

핵심은 공동체 안에서 약한 지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영적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서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떄문입니다.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한 개인이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 사랑에 감전되어 조금이나마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등의 내용은 사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앞에 예수님이라고 말을 붙이면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래참고, 예수님의 사랑은 온유하며, 예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등으로 하면 말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전체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되시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것은 곧 사랑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장에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에 대해 나오는데 이 모든 것도 예수를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운 공동체 안에서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나옵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세우는 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게 낫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에 의해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가 병고친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들고,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면 자기 교회는 무시하고 그 집회로 몰려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했는데, 기적의 은사에 집중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되려고 했던 교회입니다(11:18). 고린도 교회는 과거 우상숭배자들로 가득했던 교회입니다(12:2). 고린도교회는 어떤 은사가 최고인지 논란이 있었던 교회입니다(12:1-3). 그야말로 혼란의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대혼란의 상황입니다. 뭐가 진리인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교회의 기본은 머리인 예수를 섬기는 것, 그의 대속을 믿는 것, 그의 부활을 믿는 것, 그리고 그의 은혜, 자유, 질서의 메시지를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족, 교회, 커뮤니티, , 국가, 지구촌이 모두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를 예수의 은혜, 자유, 질서의 메시지를 품고 운영하고, 공동체에 참여할 때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14:33).

이런 관점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보면 그는 은혜, 자유,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비교적 균형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교적 인내심이 있고, 비교적 친절한 편이며, 비교적 자랑을 하지 않는 편이며, 비교적 무례하지 않고, 비교적 불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는 시민들의 자유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엉뚱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질서 안에서의 자유를 선언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란 아무렇게나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어떤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자유입니다. 미국이 그동안 외쳤던 자유는 방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바마를 하나님이 세우신 미국 대통령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1세기 고린도 교회와 같았던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사도 바울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오바마가 구세주와 같다고 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오바마는 적어도 정치계에서는 사도 바울과 비슷하다고 하는게 더 나은 표현 같습니다. 비슷하다는 것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치계에서는 그런 느낌을 준다는 말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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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감독 이창동 (2007 / 한국)
출연 송강호, 전도연, 조영진,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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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17절부터 34절까지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썼던 편지 글이 오늘날 상황에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고린도 교회는 예수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하면서 분열과 분파로 가득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이웃과 협력을 하지 않는 문제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소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데, 성만찬은 매주 또는 한 달에 한 번 하면서 교회가 얼마나 분열과 분파로 가득한지 교회 밖의 분들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고, 이웃들과 협력하지 않는 집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리, 교회법, 논리들이 기독교의 세상과의 협력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주 또는 매달 성찬식을 합니다.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게 사도 바울의 오늘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독교라고 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안티 기독교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요.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의 활동이 이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짓이 가관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기독교에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비난의 화살이 우리에게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 지적을 받다보면 잘못을 알게 되고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적을 하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며 개선하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1132절은 위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더 잘될 수 있도록 하는 징계입니다. 비평이 있어야 좋은 작품이 나오듯, 강한 비난을 통해 기독교가 좀 더 견고한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너무나 성장 위주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뒤옆 돌아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속력을 줄이고 견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33절의 내용처럼 형제를 기다려줘야겠습니다. 분쟁도 줄여야겠습니다. 파당도 없애야겠습니다.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에 감격이 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할 수”(11:26)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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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jab
Hijab by markb120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바울이 태어났던 다소에서는 여인들이 수건을 머리에 덮는 것을 예의 범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에 있던 그리스도인 여인들은 헬라 여인들처럼 예배할 때 자신들의 머리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논란이 고린도 교회에 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의 답변이 고린도 전서 11장에 나옵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게 굉장한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술과 담배를 하는 게 굉장한 이슈인 것과 비슷한 듯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았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을 복종의 의미로 해석하거나 남성의 우월성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에서는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고민이 됐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읽고 또 읽어도 주석가들의 해석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까지 바울의 편지 내용을 보면 엄격한 율법이나 법칙주의자가 아닌 것을 봤기에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을 엄격한 법으로 규정하는 듯한 어조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1111절에 바울이 표현했던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의존관계이지 종속관계나 독립관계가 아닌 것을 볼 때도 남성에 대한 권위의 표시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11장 초반에 그리스도인 모든 남자의 머리이고 남편은 모든 여자의 머리라는 표현을 씁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남성우월주의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 사회는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즉각 법적인 조치가 있는데 그만큼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해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은 남성에 대한 권위인정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여성 중심적인 해석을 하며 남성을 공격할 때 남성은 방어기재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해석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 남성우월주의자였을까요? 그리스도에 이끌렸던 자였기에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저와 제 아들의 대화에서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첫째 아들( 10)은 어제 저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삼위일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진아, 너는 내 아들이지? 동시에 너는 나의 분신이기도 해. 너는 곧 나인 것이지.” 첫째 아들 성진이는 제 아들이면서 제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아들이니까 사랑하기보다는 내 자신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이해와 질서를 위한 관계적인 표현이고 아들이 내 자신이라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설명하는 것도 그런 방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성이 여성의 머리라는 표현은 이해와 질서를 위한 것이지만 결국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11:3)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을 쓰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성경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머리에 둘러 쓰던 안 쓰던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술을 마시던 담배를 피우던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서 11장 편지글은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여성 비하 발언도 아니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발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기 위한 이해와 질서를 위한 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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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REE MILK STATION IN BEIJING -- Another American Missionary Project in OLD CHINA
A FREE MILK STATION IN BEIJING -- Another American Missionary Project in OLD CHINA by Okinawa Sob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미국 사회는 나를 기쁘게 하는 문화가 발달된 사회입니다. 내가 기쁘면 만사형통입니다. 그래서 TV, 영화, 스포츠, 마약 등이 굉장히 발달돼 있습니다. 영화, 스포츠, 마약 등은 내가 기쁜 중요한 문화입니다. 내가 기쁜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내가 기뻐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들 문화는 대체로 내가 기쁜 것에서 그칩니다. 중단합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요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러한 문화에 빠지게 되면 자칫 우상숭배하듯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기쁨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면 그만이 됩니다. 내가 좋으면 된다는 사상은 우상인데 그 우상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내가 기쁘면 되는 문화에서는 남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은 오직 나의 이익만 생각하고 남의 어려움과 남의 기쁨은 생각을 잘 안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성과 향락에 빠졌던 사람들입니다. ‘나만 기쁨문화가-= 아직도 그들에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경향이 조금씩 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 습관이 있어서 남을 존중하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남의 기쁨과 남의 고통은 그다지 챙기지 않는 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온갖 논란의 온상지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먼저 바울의 사도됨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분파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볼로의 편인가, 나는 바울의 편인가, 나는 베드로의 편인가하는 논란이 교회 내에서 일었습니다. 다 쓸데 없는 논란입니다. 크리스천은 모두 예수의 편입니다. 인간의 편으로 갈라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고린도 전서 9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또한 여전히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에는 그러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한쪽으로 가야 한다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양다리라 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탄에 한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것에 한발을 걸쳐 놓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조상이 그러한 모습을 보였기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해야 하는 문화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10 23절부터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내가 기쁜 것도 소중하고 귀한 일이지만 이제는 크리스천으로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을 권고합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면 나는 손해볼 때가 있는 것이죠. 내가 챙길 이익을 다 챙기고 어떻게 남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나만 기뻐하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교인이 되어 성숙해지기 전에 발생하는 문제로 보여집니다.

미국 사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남을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크리스천이 처음 되자마자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으면 위험한데 바로 고린도 교회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Conversion of St Paul
Conversion of St Paul by Lawrence OP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사도 바울이 비교적 빨리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유대교에서 고도의 훈련을 받은 바 있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사도들의 훈련을 끊임 없이 받았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소위 말하는 좀 놀았던사람들은 시간이 걸립니다. 금세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좀 놀았던사람들의 집합체가 고린도 교회이기에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급기야 바울 사도가 긴 편지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이 버텨나가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남을 위해 사는 크리스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를 위해 세계를 위해 자신의 기쁨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중국 깡촌에 가보면 대부분 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있기에 미국이 미국 교회가 버텨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수고를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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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 silhouette
Rainbow silhouette by Swamibu 저작자 표시비영리

사람의 의견은 때로는 중요합니다. 사람의 인식도 중요합니다. 하나님 명령대로만 살면 참으로 간단하고 편할텐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파트너십을 이루며 살면서도 동시에 우리 인간 사이에서도 파트너십이 유지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파트너십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의 명령을 이행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파트너십이겠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과 8장에서 사람의 의견으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7장에서는 결혼에 대해, 8장에서는 제사 때 쓰인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7장에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사견임을 전제로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725절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712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8장에도 보면 사람들의 의견 또는 인식도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 때 사용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을 자주 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질서에서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는 사도 바울의 사견이 참으로 중요한 상황입니다. 고린도 전서에 있는 많은 내용이 사도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들고 상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화란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항상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사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로운 자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고린도 교회에 알맞게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일에 다 명령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다 기록할수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 파트너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상황에 맞는 의견을 주는 방식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가장이 있고, 교회에 담임 목사가 있고, 회사에 사장이 있고, 학교에 학장이 있고, 국가에 수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리더들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울이는 리더이냐 아니냐는 그가 인도하는 그룹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귀 기울일 때는 좋은 리더인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백성을 망하게 하는 리더가 됩니다. 다른 리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더십은 인간의 사견의 중요성 그리고 그 사견이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너무 중요하지만 인간의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문자로 터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럴 때는 인간의 마음을 터치하셔서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시죠. 하나님이 성경에 TV, 라디오, 인터넷을 거론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자녀들에게 이런 분야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지혜를 주셨습니다. 기독교 리더들이 문자적인 하나님 말씀만 붙잡다보니 결국에는 이렇게 새롭게 이슈로 급부상하는 것들에 대해 무시하게 또한 무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새로운 이슈에 대해 사견임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견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는 사견입니다. 우상숭배 때 사용했던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도 새로운 이슈입니다.

그렇기에 리더는 중요한 것입니다. 리더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오늘날의 컨텍스트(상황)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며 새로운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내놓을 때 따르는 무리들이 행복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유를 경험합니다.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리더가 게으르면 너무나 간단하게 말을 합니다. “그건, 성경에 없으니까 하지마!” 그런 지도자와 함께 있는 추종자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이슈에 대해 눈과 귀를 가려야 합니다. 아니면 몰래 그런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죄의식이 발생하죠. 그것이 사탄의 고단수 수법입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리더가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람들과 섞여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듣는 이를 힘들게 하는지 그 리더도 잘알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 문에 새롭게 부상하는 새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은 기여는커녕 방해자로만 여겨집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인사이트가 없기 때문에 일단 반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다 비성경적이라는 태도는 기독교인을 점점 세상에서 영향력이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자동차, 전화, 셀폰, 컴퓨터, 노트북, 비디오 프로젝터, 음향 시설, 전기, 각종 악기, 인터넷, TV, 영화 등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생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거론한 분야들은 대부분 초기에는 비성경적인 분야였습니다.

새로운 분야가 나오면 하나님 마음을 품은 자들이 이것을 성경에 비추어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 문명의 도구는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합당한 설교를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과 8장에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견임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경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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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 Awaits You!

Hell Awaits You! by danny.hammontre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하나님은 여기 적혀 있는 자들에게도 천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죽는 날까지 주십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이 내용이 나온 후에
11절에는 다음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위와 같은 행동을 했던 분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에 69절과 10절에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통해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전체를 살펴보면 지금 고린도 교회는 69절과 10절에서 묘사하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혼란스러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혼란에서 질서를 잡아주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절만 보면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지금 고린도 교회의 교인으로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도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사도 바울은 이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전에 이렇게 지냈던 새로운 신자들이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영향'이라함은 도덕적인 영향보다는 다른 신을 섬기도록 하게 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69-10절에 나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종교의식으로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종교 의식 중에 그러한 행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고린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다시 과거로 돌아갈 어떤 접촉점이 있다면 좋지 않은 것이겠죠. 바로 그것입니다.

69-10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용서못할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용서를 받을 수는 있지만 다른 신을 섬기도록 하는 성향이 있기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 멀리하기를 사도 바울은 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과 사귀기를 거부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였기에 그들과의 사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럴만한 믿음이 굳세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 계속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나 어떤 믿음의 모임이 성숙해져있다면 69절과 10절에 나오는 분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하지만 성숙도가 낮다면 철저히 배제하도록 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612절에서 모든 게 가하지만 모든 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자유와 질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자들에게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있습니다. 모든 게 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유라면 유익하지 않고 구원의 기회가 점점 좁혀지게 됩니다.

당시 창녀 또는 남창들은 성행위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의식을 했다고 합니다. 성행위는 종교적인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미국(또는 한국) 사회를 봅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이 말씀과 미국을 보면서 보통 드는 생각은 미국이 이런 자들에게 너무 관대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너무 미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고전 69-10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체로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다른 신이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율법의 신을 섬깁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아닌 율법을 섬깁니다. 우리는 유명한 목회자를 섬깁니다. “OOO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야라고 말하며 그의 말이 하나님 말씀처럼 탈바꿈합니다. 대형 교회를 섬깁니다. “OOO 교회에서 그걸 했으니 우리도 하자!” 대형 교회가 하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또한 성취의 신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성취하게 하셨다고 자랑을 늘어놓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69-10절에 나오는 사람들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어떤 요소가 지금 교회 안에,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머니, 섹스, 파워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보다 머니가 더 좋고, 하나님 나라보다 섹스가 더 좋고, 하나님 나라보다 파워가 더 좋으면 그게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파괴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해결해야 할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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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tar
Ishtar by seriykotik1970 저작자 표시비영리


고린도전서의 배경은 미국과 비슷한 같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중시하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사원(temple) 1,000명의 창녀를 고용해 비너스 신을 섬겼다고 합니다.

미국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메카라고 있죠. 그래서 자유하면서도 방종하는 경향이 짙은 나라입니다. 그만큼 그에 대항하는 보수세력도 강하게 있습니다.

섹스와 마약이 보편화되어 있는 나라에 고린도전서는 적용할 거리가 많은 책이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 탐욕스러운 , 도적질하는 , 우상숭배자, 술주정뱅이와는 자리에서 식사도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아버지처럼 하는 간곡한 부탁이면서 명령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는데 그러면 교회에 누가 다니는 것일까요? 얼마 저는 미국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5학년)에게 학교에서 누군가가 캔디를 주면 받아 먹지 말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캔디에 마약 성분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고 초등학교에도 마약을 파는 아이들이 침투했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당연히 자식을 보호하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마약을 파는 아이가 있다면 아이와 어울려지내면 되겠죠. 그래서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렇다면 마약을 파는 아이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아닌가요. 그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중에는 과거에 마약을 팔았던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녀가 됐죠. 자식에게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과 놀지 것을 말하면서도 편으로는 그들도 하나님에게서 사랑 받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분도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 탐욕스러운 , 도적질하는 , 우상숭배자, 술주정뱅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를 위해 사도 바울은 그들과 어울리지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사를 보내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약 중독인 자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는 전도자를 보내실 것이고 성적으로 문란했던 자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는 전도자가 도울 것입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서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기에 소위 말하는 죄인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창녀를 측은하게 여기셨고 세리와 어울려 지냈습니다. 예수님이기에 그렇게 하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혹받기에 쉬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있을만큼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받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약함은 이미 고린도전서 1, 2, 3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그들은 약간은 어설픈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혜로 교회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별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분별력으로 교회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분열될 수밖에 없고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훈계를 하듯이 강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 탐욕스러운 , 도적질하는 , 우상숭배자, 술주정뱅이를 비롯해 동성애자, 마약거래상, 다단계 판매를 목적으로 교회에 침투한 , 이단인데 교회에 혼란을 주기 위해 침투한 등은 모두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숙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전도자, 선교사, 목사라면 이들을 품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명확한 경계선은 없습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들을 품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로 불렸던 자들 중에도 이런 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징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회도 있어야 합니다. 기회는 인간이 주는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뜻을 인간은 간파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돌보는지 모릅니다. 마약중독자를 돕는 선교단체의 목사님은 마약거래상이었다가 나중에 그들을 돕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몸을 파는 직업을 가졌다가 나중에 목회자가 자식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탐욕스러웠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의 길을 가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앞잡이였는데 지금은 주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분도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가 지금은 금주 센터를 차리고 음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봉사자도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성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교회를 욕하겠습니까. 교회도 연약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고 질서도 필요한 몸체입니다. 특수 사역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 특수 사역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관점으로 고린도 전서 1장부터 5장까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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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로마서 6

0m부터 100m까지

100m 달리기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습니다. 100m 달리기를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비유를 로마서 앞에 장에서 나눈 바 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을 끊고 달리면 영광, 환난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0m부터 100m까지 별의 별 일을 다 겪습니다. 달리는 중간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죄를 지음),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병에 걸림),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끝까지 무사히 잘 달릴 수도 있습니다. 피니시 라인까지 가는 중에 환호를 받게 됩니다. 영광이 분명 있습니다. 박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끄러지면 어떻게 합니다. 다시 출발선으로 가서 달리기를 해야 합니다. 다음 경기가 있듯이 다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믿음으로 출발한 이의 최종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든 피니시 라인을 향해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한 이는 영원한 생명이 이르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목적지는 너무나 명확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쓰러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결국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있어도 죄는 짓는다

이 비유를 마음에 품고 로마서 6장을 읽으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분명 죄를 짓습니다. 중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 출발한 자와 다른 점은 믿음으로 다시 출발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출발한 자는 넘어지는 것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계속 넘어져도 무감각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같이 넘어졌는데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같이 넘어져도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노예로 있는 자와 의의 종으로 있는 자의 다른 점입니다.

의도적인 죄인?

넘어져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 의도적으로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잘 뛰면서 피니시 라인을 잘 통과하려고 합니다. 아무렇게나 뛰려고 하는 사람은 죽은 육상선수입니다. 죄 아래서 죽은 자와 같습니다. 대부분 육상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뛰려고 합니다. 특히 믿음을 가진 자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뜁니다. 그래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잘 뛰었는데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레이스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비유가 잘 이해가 되십니까?

정리를 하면 100m 달리기를 할 때 아무렇게나 뛸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마음 놓고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열심히는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보다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하나님의 의를 품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립니다. 아무렇게나 뛰는 사람은 중간에 넘어지면 레이스를 그냥 포기합니다. 열심히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은 자는 다시 출발점으로 가게 되어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출발과 과정과 마무리가 모두 다릅니다. 겉모양은 같아 보이는데 내막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자

오늘 사도 바울이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믿음으로 출발한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은 자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습니다.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에는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가는 사람입니다. 중간에 실수도 있고, 죄도 짓고, 넘어지고, 영광도 있고, 박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방향성이 너무 정확합니다.

, 여기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결론 짓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서 623).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그의 은혜를 깨닫는 것, 그가 보내신 이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00m 달리를 하는 중에 겪는 경험은 믿음으로 출발한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내면에서 다른 게 분명 있습니다.

적용

나는 100m 달리기를 하면서, 중간에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영광의 박수를 받기도 했고, 욕을 먹기도 했고, 부상도 당하기도 했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다. 나는 다시 믿음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믿음.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믿음. 또 넘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선다. 나는 빛의 자녀이니까.

Think Deeper

진리도 마찬가지다. 오직 진리를 따를 때에만 진리를 알 수 있다. 쪼개고 따지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오히려 진리를 진리답지 못하게 한다. 진리는 확고하고 장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로 부르지 말고 우리가 직접 진리를 향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정의하려고 시도한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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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e Yang
    2009/04/18 18:3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박병기님의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은 자입니다.'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출발점에서 규칙을 위반하면 아무리 잘 달렸어도 그 경기는 무효 입니다. 옛품성으로 이루어 놓은 성과물과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이 없어진 상태에서 성취한 신앙은 무효 입니다.
  2. 2009/04/18 20:0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요즘 쪼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경: 로마서 4장

누굴 내 집 안으로 들일 것인가

지난 밤에 꿈을 꿨습니다. 저는 집 문 앞에 서 있었고 하나님은 저에게 아들 세 명 중 한 명만 집 안으로 들여 보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들의 마음 가짐을 살펴본 후에 들여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왜 꼭 1명일까 3명 다 들여보내면 안 될까 하고 생각하면서 아들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이 집으로 들어올 자격이 어떻게 있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아들은 말합니다. “저는 밖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요. 착한 일도 많이 했구요. 당연히 집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은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세상이 다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아버지는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 아들이 말합니다. “저는 온갖 범죄를 다 저질렀어요. 죄송해서 아버지. 부끄러우시죠. 그런데 저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아들이 두 명이거든요. 갑자기 아들이 세 명이 됐고 아들 중 한 명만 집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꿈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입장에서 세 번째 아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아들이 집에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자는

잠에서 깨어 로마서 4장을 읽는데 세 번째 아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보다는 당신을 중심에 두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인간의 업적은 하나님께는 그닥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 우주에 큰 변화가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업적은 인간들만이 박수를 치는 일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잘못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게 잘못됐다는 말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흑백논리를 펼치시는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죠. 무엇을 더 우선시하느냐의 문제입이다.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똑같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저는 불의합니다. 저 같은 자를 의롭게 하시려는 주님을 이 세상의 중심에 두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45). 단순히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 자를 찾는 것이죠.

하나님의 커트라인은 믿음

인생을 열심히 살았고 많은 업적을 쌓은 분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았고, 많은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둔 분들은 물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분들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둡니다. 내가 잘나서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품삯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로마서 44).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쓰는 의도를 파악하시겠습니까? 로마서 3장 나눔 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커트라인을 믿음으로 두셨습니다. 공로,. 행함, 업적은 보너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공로, 행함, 업적은 헛고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봉은 없고 보너스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과 행동을 강조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25)



믿음과
100m 달리기 비유

우리의 의로움은 믿음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로마서 3장에서 나눴던 순 진짜 믿음입니다.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공로, 행함, 업적, 도덕, 율법을 중요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믿음을 더 우선으로 두셨다는 것 입니다. 이 모두가 연결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피니시(finish)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100 m 달리기를 합니다. 피니시 라인을 10초로 통과했습니다. 대단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중간부터 뛰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점이 다르면 10초 기록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대단한 기록이지만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00m 15초로 통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출발을 제대로 했고 좀 늦지만 피니시 라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대기록은 아니지만 기록은 인정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출발도 제대로 하고 피니시도 잘했는데 빨리 달리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습니다. 이것은 부정 레이스가 되고 기록은 모두 박탈됩니다. 여기서 100m 달리기의 출발점은 믿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기록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서 잘 마치면 늦든 빠르든 기록은 인정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출발되지 않으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기록은 박탈당하게 됩니다.  업적, 공로는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100m 경기에서 부정출발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시 출발하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업적, 공로, 기록은 다 무시하고 다시 출발하길 바라십니다. 믿음이 바로 그것인 것 같아요. 정당한 출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바로 정당한 출발을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정당한 출발을 할 때 100m 기록이 인정되듯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니시 라인을 좋은 기록으로 통과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적용

내가 부정출발을 했을 때 하나님은 나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이 나에게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원점으로 돌리셨던 하나님, 나는 그분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삶에서도 나는 부정출발을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피니시 라인에서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출발하고 있는지, 내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Think Deeper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새롭고도 철저하게 행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깥이나 에 계신 하나님은 많은 세속적 조직들 속에 묻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면에 계신 하나님께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밖에 계신 하나님이 사랑의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경험될 수 있는 것처럼, 내면에 계신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적 생명의 원천일 뿐 아니라 태초의 혼돈처럼 엄청난 혼돈의 원인일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상처 입은 치유자,’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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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e Yang
    2009/04/18 18:5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요즈음 경제상황이 엄청나게 나빠서 너 나 할 것 없이 고통을 받고있읍니다. 부동산 시장이야말로 가장 영향을 받고있읍니다. 거래가 힘든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은 'buyer's market'입니다.

    박병기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제 생각해 보았던 '믿음은 seeker's market'이 다시 생각납니다.

    어려울 때 일수록 말씀 중심으로 어려운 상황을 받아드리고 이겨 나갈 힘을 찾는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2. 2009/04/18 20:0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Seeker's Market. 구하는 자를 찾으시면 하나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성경: 로마서 217-29

성경에 대한 오해

로마서 2장을 읽다보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잘못 읽으면 온통 행동을 잘하자, 실수를 하지 말자, 죄를 짓지 말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행동을 잘하고, 실수하지 않는 게 좋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2장을 쓴 사도 바울의 의도는 그게 아닌 듯합니다. 글을 쓸 때는 핵심 포인트가 있는데, 2장의 핵심 포인트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양심입니다.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속사람이 좋은 사람은 율법과 행동을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은 행동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양심 또는 속사람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관점으로 로마서 2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행동에 집중하는 우리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과 행동에 집중을 합니다. 로마서가 쓰여진 당시에도 율법과 행동에 대한 논쟁이 대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을 많이 알면, 행동을 잘하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이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지식사회에서 많이 공부한 사람은 귀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 신앙에 있어서 많이 배움이 신앙의 수준으로 여겨지는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크리스천 신앙에서는 속사람과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은 가르칠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게 참 역설적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격이 있는데 스스로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니 어쩔 수 없이 내세우는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역설로 가득차 있습니다.

지식인과 양심인

많이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많이 알 때 분별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이 자랑이 되면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을 남 돕기에 사용하면 그것은 옳지만 나의 안녕, , 명예를 위해 사용하면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셈이 됩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며 자신의 양심과 속사람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매순간 내 속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칭찬이 계속되면 내가 잘난 줄 알고 교만해집니다. 교만을 꺾는 훈련이 잘된 분들은 하나님께서 계속 쓰십니다. 그러나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는 사람은 결국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스스로 역행하게 됩니다 (로마서 222).

속사람을 살피셨던 예수님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신의 아들이었지만 속사람을 계속 살피는 자였습니다. 능력의 주가 잠 잘 곳도 없이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 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로마서 229).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쉽게 교만해지는지 우리 마음은 교만덩어리라는 암으로 덮히게 됩니다. 암이 전이능력이 좋은 것처럼 교만덩어리도 쉽게 온 마음으로 전파됩니다. 결국은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마음 지킴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를 칭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마음을 잘 지킨 자

마음을 잘 지킨 자는 의지가 생기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깁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 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고귀한 사랑이 담겨 있으면 되는데 우리 마음 밭에서 이런 복음이 튕겨 나가고 우리 중심적인 사고가 지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해야 하고, 우리가 선하고, 우리가 거룩해지고, 우리가 선교하고, 우리가 부흥시키고….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 중심적인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잘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역하고, 하나님의 부흥에 감격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온통 우리 영광에 삶을 도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한 결과입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 vs 빗 나가면 쌩고생

최근 한국에서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모 광고에 출연해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고 말을 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개고생이라는 표현이 자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리꾼들은 엄홍길 대장과 같은 존경받는 이가 이런 광고카피를 읊조리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개고생이라는 표현은 표준어라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나 고비가 닥쳐 톡톡히 겪는 고생'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 광고 카피를 패러디한다면 마음은 뒤전에 두고 행동과 율법에만 집중하면 개고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신앙이 빗나가면 고생

신앙이 빗나가면 정말 고생이 심합니다. 성경 말씀은 굴레가 됩니다. 모슬렘들이 그렇습니다. 꾸란은 그들에게 굴레입니다. 그들은 선한 행동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랬고 오늘날 유대인들도 그렇습니다. 고생이 심하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값싼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 지킴이 이뤄지면 그러한 행동은 대체로 따라온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광고카피를 빗나가면 쌩고생이라고 바꾸고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 지킴이 잘 안 됐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그를 격려하고 사도로 세우려고 노력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엔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행동만 봤더라면 배은망덕한 인간이지만 여전히 은혜를 허락하셨기에 그의 마음이 드디어 바뀌었고 결국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그게 성경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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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vs. 빗나가면 쌩고생이다  (0) 200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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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로마서 21-16

신은 없다?

어제 쓴 글의 댓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안다'구요?? 당신은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그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 추가할 게 있습니다. 그분에게 신은 없습니다. 신을 경험한 자에게 신은 있습니다. 니체에게 신은 없지만 테레사 수녀님에게 신은 있습니다. (주: 니체는 신이 없다고 말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신이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고 말한 것임). 버트란드 러셀에게 신은 없지만 그의 딸(목사의 아내)에게 신은 있습니다. 신은 관계적입니다. 신은 기능적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신은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신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관계는 이성으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지만 신의 존재를 알려면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글 자체는 이성이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신과의 영적인 교류가 이뤄지면 성경은 관계를 맺어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 세상의 일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게 관계에서 이뤄지지 무엇을 많이 안다고 이뤄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해가 전파되어 우리가 머리로 알 수 없는 신을 머리로 알게 끔 프로그램화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원래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을 바탕으로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이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지나치게 부풀려졌습니다.

신을 인정하는 양심

    사도 바울은 로마서 214절과15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어서 그것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게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덕과 율법이 필요할까요? 이는 아마도 인간이 양심만으로 버티기에는 죄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덕과 율법이 없으면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이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율법 없이도 율법을 실천합니다. 양심으로 살기에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돕지 말라도 해도 돕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도 한국인들 중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심 또는 신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그 양심이 더욱 다져지고 강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치고 민초를 위해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버트란드 러셀도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사위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비를 지원했는데 이는 양심에 바탕을 둔 행동입니다. 이성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될 분이었습니다.

양심을 가리는 교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질을 받을까요? 첫째는 양심을 실천하며( 2:13)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생기는 부조화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가 나쁘지는 않지만 덩치가 커지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내가 알려질수록 피할 수 없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그런 것과 패키지로 따라온다.” 교회가 크건 작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으로 회복하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양심에 털났다

    양심에 털났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털이 나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근본 양심은 이것을 압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압니다. 믿는 자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원래의 양심에 성령까시 합세하시니 괴롭습니다.  이 때 우리는 두 가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남 탓하는 것입니다. 내 털난 양심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남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를 합니다. “, 내가 이렇게 양심에 털이 나 있구나.”하고 말이죠.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로마서 24).  그 용서와 인자하심을 깨달으면 내 양심도 회복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자는 결코 신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이 없이는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정신적인 문제로 해석하더군요.

앤서니 김의 양심 회복

   신의 존재를 거부하더라도 죽음과 고통 앞에서는 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LA 2009 412일자 스포츠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골프 선수 앤서니 김에 대한 기사입니다.

    앤서니 김은 경기 후 소감에서 "대회 첫 날 75타로 부진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9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LA 에인절스의 유망주 투수 아덴하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읽고 골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앤서니는 "기사 맨 마지막 문장에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22살이라고 해도 말이다. 때문에 매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야 된다'고 써 있었는 데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 평생 꿈이 매스터스에서 한 번 쳐보는 것이었다. 사실 인생에서 보기나 3퍼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여기 나와서 골프를 친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기쁨이라는 걸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오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해서 버디 11개를 잡은 것 같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원문 기사 보기]

    남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안에 있던 양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원래 그 안에 있던 양심은 스포츠를 통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에서 주는 메시지가 온통 성공, 승리, 돈이니 그의 양심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죽음과 육체적인 고통은 메가폰 역할을 합니다. 양심 메가폰.  양심 메가폰을 든 존재는 바로 신입니다. 신이 없으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 양심을 작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에 털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우리에게 다가올 게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신의 심판입니다 (2:5). 그럼에도 심판권이 있는 신은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려주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2:4). 기회는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털난 양심을 계속해서 제거합시다. 죽는 그날까지.

적용

    개인적으로 양심에 꺼리끼는 일이 많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다 내놓고 양심 회복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심어주셨던 그 양심. 홀가분하지는 않다. 여전히 내 안의 양심이 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오늘 그 털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 종일 회개의 기도를 하고 싶다.

Think Deeper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바로 그런 깨끗함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주여, 깨끗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깨끗함과 정직함의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함의 능력이 아니라 깨끗함에 대한 갈망입니다. [김동호 목사, ‘깨끗한 크리스천’,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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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2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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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 2009/04/12 10:0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주의 은혜라!
  3. 2009/04/12 10: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렇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고 순결한 크리스챤이기 위해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하는 악순환만 연장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고 자백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은혜를 주셨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계속 순결하고 깨끗해 지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 보다 잘 되질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을 네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지키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고 순결한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나 그 생명이 약하면 안됩니다.
    생명을 살리리고 강하게 하려면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자백하여 나의 모습을 인정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매일 매시간 매분 말씀으로 우리의 생명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4. 2009/04/12 17:1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오늘 설교 말씀을 듣는데 예수님의 끊임 없는 용서와 격려가 베드로를 살렸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실망했고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끝까지 이해하고 격려하고 부활 후에 세워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부활의 핵심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참으로 은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발버둥칠 때는 안 되는데 성령의 에너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강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결단이지만 그렇게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성령 전체에 흐르는 Theme입니다. 내가 하려고 해서 잘 되면 교만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 2009/04/12 23: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내가 하려고 함은 주님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은혜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된 생명은 강력 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강력하다면 우리는 또,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할 필요성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강력하다면 우리는 바로 변화되고 거룩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으로 부활된 생명은 "강력하다!" 보다는 "우리는 말씀의 양식으로 강력하게 할 필요가 있다!"가 필요합니다. 아멘!
      우리가 매일 매일 주의 말씀을 먹어 부활 생명을 더 강하게 하길 원합니다.
  5. 2009/04/13 00:4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멘!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6. Joe Yang
    2009/04/19 08:5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Think Deeper가 Think Looser로 흔들리면서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것 같아서 석연치 않습니다.

    '깨끗함에 대한 갈망'은 이런 대화의 광장에서 남의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의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을 또 발견하면서 더-더 씻어지기를 바랄뿐 아니라,

    남의 그런 모습도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끼어(?)들어서 함께 깨끗해지려는 안타까움이 '깨끗함에 대한 갈망'이라는 뜻으로 새김질하면서 다시 한번 더 글을 읽으면서 기도합니다.
  7. 2009/04/19 15:5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의견 감사합니다. 그 글을 올린 의도는 깨끗함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해질려고 해도 깨끗할 수 없는게 깨끗함이라는 정의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중심에 내 생각, 내 정의, 내 의가 있을 때 그것이 깨끗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도 내 생각, 내 정의, 내 의겠죠...^^


로마서 118-32

기독교와 할리우드 영화의 관계

기독교와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들은 오랜 시간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되냐고 질문을 하면 대체로 나오는 답변은 섹스, 폭력 자극적 컨텐트 으로 가득한 할리우드가 세상을 망쳐놓고 있다 답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슬렘 사회 지도자들도 같은 이유로 할리우드 영화를 싫어합니다. 한국 드라마나 한국 영화가 모슬렘 사회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자극적인 컨텐트가 거의 없기 떄문입니다. 한국 드라마 자체에 자극성이 없다는 아니라 사회로 수출된 드라마나 영화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할리우드 이야기로 돌아오면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경우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영화 내용에 대해 자주 비평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좋아할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자극하는 영화는 뜬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오히려 네가티브 이미지 마케팅 하게 됐습니다. , 기독교인들이 펄펄 뛰면 마케팅이 되어 영화를 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패러다임 시프트 이뤄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패러다임 시프트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보는 인간사와 하나님 관점

로마서를 읽다보면 인간이 욕정대로 사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로 성적인 욕정이 나옵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바로 이런 성적인 욕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메시지를 던집니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내용이 주를 이루며 시가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128). 재미난 사실은 성경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도 그렇구요. 요즘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을 자주 듣게 되는데 바로 로마서 128 내용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사입니다. 우리는 중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불손하고, 오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꾸미고, 우매하고, 신의가 없고,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만 그런 아니라 우리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그럼 똑바로 살아야 되겠네

로마서 118절부터 32절까지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똑바로 살면 되겠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똑바로 있을까요? 스스로 위와 반대되는 삶을 있을까요?  그럴 없습니다. 인간은 내버려두면 어쩔 없이 허망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해야 일은 똑바로 사는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똑바로 살게 됩니다. 로마서 122절을 보면 사람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존재라고 나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어리석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혼자 알아서 있다는 허망한 생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에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럴 필요한 것은 스스로 똑바로 사는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인정하는 것이 출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를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그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입니다. 세상을 만든 ( 1:20) 보고 인정하는 것이 출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1:28). 그것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중심적인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뜻대로 됐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말을 들어줬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뜻대로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는 내용을 우리가 기도했기에 하나님이 들어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아니라 이미 우리의 기도 내용이 하나님의 안에 있기 때문에 들어주셨을 뿐입니다. 피조물이 일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훤히 알리셨습니다 ( 119). 우리가 거부할 없을 정도로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오신 일은 가장 명확하고 핑계를 없는 그의 뜻입니다.

할리우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 그렇다면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나 대중문화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어떤 내용을 다룰 레벨이 있다면 인간의 문란한 삶은 A, B,C, D 있을 B 레벨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B급에서 대화를 하고 언쟁을 하고 싸움을 합니다. A 레벨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self-glorification) 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나 대중문화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사고방식이 바로 가장 우리의 죄입니다. 대중문화나 할리우드 영화는 바로 이것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A 되니까 B,C,D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도덕적으로 살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해라,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다, 우리가 일은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면( 126-28) 그렇게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생각할 때도 상당히 우리 중심적입니다. “내가 잘하면 되는데…”라고 생각하는데 오판입니다. 내가 잘하는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준비 중에 있는데, 하나님께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계속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나요? 뜻에 따르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서고 주님 말씀하시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근원임을 너무나 압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하게 하소서. 이런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도를 것입니다.

Think Deeper

내가 니체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우리 세계에는 신적인 질서나 선의 자취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세상은 인생을 살기에 무척 끔찍한 곳일 텐데, 니체도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는 아주 일관성 있는 무신론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배척한 성경적 세계관에서 아무것도 빌려 생각이 없다. 그의 철학과 성경의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대조는 매우 교훈적이다. 니체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도움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쟁점을 명약관화한 용어로 규정지었다는 점이다. <리처드 마우, ‘무례한 기독교,’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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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회퍼, 믿음과 정치에 관하여 by 윌리엄 페더러

    2009/04/10 15:17
    삭제
    1997년 지미 카터는 그의 책 <사랑의 실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니버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안전을 위해 미국에 머물도록 설득했다. 본회퍼는 거절했다. 그는 독일에서 박해받는 나머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고...히틀러에 항거하여...공개적으로 나치와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본회퍼는 마침내 체포되었고 수감되었으며, 1945년 2월 4일, 연합군이 독일을 해방시키기 불과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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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vior
    2009/04/10 15:2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신은 없습니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안다' 구요??
    당신의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것을 믿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2. 2009/04/10 20:4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블로그나 이메일 주소가 있으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텐데 안타깝습니다. 혹시 남겨주실 수 있으신지요...신의 존재는 관계 안에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설명으로 되는 건 또 아니겠지만요. 님과 저를 위해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1장1절-7절


복음은 무엇일까( 11)

복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교회를 다니시지 않거나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복음이라는 말을 번도 듣지 못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the Gospel)’ 사전에서 찾아보니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라고 나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은 우리를 정말로 기쁘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반갑고 즐거운 소식이 그렇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갑고 기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많은 이에게 굴레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배우 배용준 씨가 욘사마(the lord Yon) 불립니다. 욘사마가 되었을까요? 일본 여성들에게 복음 던졌기 때문입니다. ‘겨울 연가(Winter Sonata)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용준 씨는 일본 여성들에게 따뜻한 남자’ ‘돌봐주는 남자 비춰집니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주인공에게 부여된 허상입니다. 그럼에도 남성우월주의적 사회에서 배용준이라는 배우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매우 반갑고 즐거운 소식인 것입니다. 최근 한류에 관한 영문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학자들은 겨울 연가라는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수준이었다는 동의합니다. 제가 아는 대만 여성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4번이나 봤다고 고백했습니다. 드라마에도 역시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갖고 있는데도 전하지 못함

성경은 진짜 복음 담고 있지만 이것을 일부 교회와 교회 리더들이 복음으로 전하지 않고 부음(訃音)으로 전하는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합니다. 부음은 모두 아시겠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기별입니다. 이상하게 복음을 들어야 우리는 부음 듣는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교회에선 복음 전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부음처럼 들릴까요. 그럴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 복음이 전해지는 아니라 내가 복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든 복음이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 일본 여성들에게 (the lord)’ 것처럼 예수님은 크리스천에게 (the Lord) 되시는 것입니다. 겨울 연가가 따뜻한 남자,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줬다면 예수 복음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the Lord Jesus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복음이 아름다운 이유

예수 복음이 욘사마 복음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욘마사가 드라마에서 주는 기쁨에 비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 17)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평화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너는 앞으로 문제가 없을 거야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가 있는 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론 힘들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에 예수 복음을 접하면 다시 평화와 은혜를 예수께서 주십니다. 일본 여성들은 욘사마 복음 믿고 순종( 1:5)하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쁨, 영원한 평강을 주는 예수 복음은 말로 형용할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말로 표현해도 없습니다. 체험해보시고 싶으십니까? 지금 눈을 감고 예수께 간절히 기도해보십시오. 당장 무슨 변화가 없는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실한 우리의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울 , 가장 바쁠 , 가장 고통 받을 , 우리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듣고서도 속에서 그것을 누리고 살지 못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나는 은혜와 평화를 얼마나 누리고 살고 있을까. 누리지 못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복음을 생각하고 은혜와 평화를 누리길 기대해봅니다.

Think Deeper

창녀나  세리들은 분이(예수님이) 그들의 직업적 평판에는 관심이 적은 대신 그들의 영혼에 담긴 슬픔과, 그들의 삶을 지경으로까지 몰고 사망의 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주목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깨끗한 영혼을 원했고, 예수님은 용서와 구속을 통해 그들을 도울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이 그분의 복음이었다. <고든 맥도날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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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9 15:2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2. 2009/04/09 21:3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맞습니다. 동감합니다. 주님께서 문화 속에서 하시는 일들...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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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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