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내렸을 때 제1 목적은 도덕적인 이스라엘 사람을 만들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율법을 지킬 때 자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역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유대인에게 그리고 비유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알게 하고 자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고 완성시키러 왔다는 말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세의 나이가 120세가 되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하나님으로부터 통보받았습니다. 신명기 31장 초반부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걱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31장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조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예수님을 강조하고 매주 그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7년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라고 합니다. 이유는 역시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31:9-13)



7일마다 (때로는 더 자주)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대형 교회에서 중형교회에서 소형교회에서 가정교회에서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큐티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삶 속에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기 쉬운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를 잊지 않아야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시상식이 열렸다고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그 시상식에 수상 주인공을 초대해서 가운데 무대에 세워줘야 그가 수상자로 인식이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상식장 주변에서 서성 거리는 배우가 되겠죠. 그 배우는 이름이 불려져야 가운데 무대로 올라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계십니다. 그럴 이유가 하등에도 없는데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드려야 그가 무대 가운데로 설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나님은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영광스럽지만 하나님은 자녀로부터 영광됨을 칭송받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에게서 아빠는 최고야! 엄마는 최고에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고입니다. 온갖 기적을 보이시고 배고플 때는 양식을 베푸시고 적들이 있을 때는 먼저 가셔서 그 적들을 해결해주신 분이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칭송은커녕 인식도 못하고 삽니다. 뛰어난 배우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그 배우가 누구더라?”라고 질문하는 자들처럼 삽니다. 배우가 눈앞에 있는데 뉘시더라?”라고 하면 그 배우가 얼마나 민망스럽겠습니까. 배우는 숨고 싶겠죠. 하나님도 백성이 인식하지 못하면 숨으십니다. 신명기 3116절 이하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숨지 않으시도록 오늘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찬송해야겠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7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021219-A-1797M-034
021219-A-1797M-034 by US Army Korea - IMCOM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우리가 보통 원수(enemy)’라고 말하면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원수는 나와의 관계에서 뭔가 맞지 않아 원수가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객관적인 원수가 아닐지라도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원수에 대해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원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원수입니다. 이런 원수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구약의 하나님도 반드시 쳐서 없앨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 무리를 쫓아내는 장면이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20장에 이러한 원수에 대한 지침을 내립니다. 전쟁을 하도록 합니다.

신명기 20장에 두 종류의 원수가 모두 나옵니다. 203절에 나오는 원수는 첫 번째 종류의 원수입니다. 원수와 싸움을 할지라도 평화를 위해 중재의 제안을 할 것을 설교자 모세는 명령합니다. 2014절에는 원수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바로 두 번째 종류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 두 종류의 원수성향이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민족에게 이 두 종류의 원수 성향이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원수가 되면 우리는 제 명대로 살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원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도록 선택한 자들입니다.

jerome lebanner pre-fight
jerome lebanner pre-fight by tdub303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K1이 요즘 인기를 끄는데 K1에서 상대는 일단 적(enemy)이고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규정 안에서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규정 밖의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적에게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승리 후에는 적에게 격려하고 적와 악수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싸우느라 수고한 적에게 격려를 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알카에다는 서방 세계의 적입니다. 원수입니다. 그들의 폭탄 테러, 자폭 테러는 반드시 막아야하고 그들에게 대적해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 신명기 20장 초반에 나오는 표현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들은 이겨야할 원수인 동시엔 땅을 얻으면 안 되는 원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왜곡하여 세상에 전하기 때문입니다. ‘성스러운 전쟁을 외치며 그들은 오늘도 테러를 자행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이것은 왜곡된 신이고 결론적으로 다른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마 강호순, 잔인한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은 어떤 원수일까요. 그들은 반드시 이겨내야 할 원수입니다. 사회의 적입니다. 그들은 또한 사탄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적입니다. 사회에서 인권을 보호받을 수 없는 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민족이나 집단이 아니고 개인이기에 격리 수용되어 사랑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격리됨은 두 종류의 원수 짓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도소 수용 비용을 국민의 세금으로 감당하는 것은 바로 국민이 이 원수들을 사랑하는 간접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억울하게 잡혀 들어간 사람을 제외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교도소의 재정이 궁핍하다고 이들을 조기 출소시킨다든가 이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다시 준다면 이는 결국에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행위가 됩니다.

사랑은 하고 싶은대로 아무렇게 하게 내버려두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운전을 하면서 집으로 오는데 둘째 아이가 자동차 뒷쪽의 창문을 갑자기 열며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해 문을 닫으라고 했고 창문을 마음대로 열지 못하도록 잠금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는 둘째 아이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둘째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Galeria HDR
Galeria HDR by Davic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교도소도 그런 개념일 것 같습니다. 교도소 밖으로 나오면 많은 사람을 너무 괴롭히고 죽이기도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모아두고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러는 중에 착한 심성을 갖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행위인 것 같습니다.

원수를 밟아 이긴다는 말은 그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는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개념이 강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3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히노끼
    2009/10/23 08:3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가끔 원수때문에 헷갈립니다.
    어디까지가 사랑인지 그렇다면 사탄이 하는 일은...명확한 글, 감사합니다.
    • 2009/10/23 11:26
      댓글 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주님.

이집트 왕자
감독 스티브 히크너, 브렌다 챕먼, 사이몬 웰스 (1998 / 미국)
출연 산드라 블록, 랄프 파인즈, 대니 글로버, 미셸 파이퍼
상세보기

신명기 16장에 나오는 아빕월은 우리로 말하자면 1월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모세와 그의 무리에게는 아빕월이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 아빕월에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빕월에는 유월절이 있죠. 영화 이집트의 왕자에도 나오지만 아빕월의 14일인 유월절에 이스라엘 민족은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또한 유월절에 이집트를 빠져 나왔고 예수님도 유월절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했고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월절은 항상 두 가지가 함께 합니다. 고통에 이은 자유가 함께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은 고통이었지만 이집트를 나온 것은 자유였습니다. 또한 노예 생활 중에 하나님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고통 중의 자유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그것에 따른 자유도 유월절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란 단어는 영어로 Passover인데 말뜻은 빗겨나간다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지만 결국에는 재앙의 타겟에서 빗겨나가 축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결국엔 자유의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일, 하나님께 바치는 일 등은 이스라엘 민족을 얽매이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유의 메시지를 계속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고자 했던 자유의 메시지를 매번 상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물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물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16:15) 예물을 바치면서 자유를 기억하게 하고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기 위한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611절에 보면 노예, 고아, 이방인, 남편을 잃은 자들과 함께 축하하며 기뻐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설교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소외된 자들인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도 자유를 얻게 하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묶인 자를 풀어주려는 하나님의 시도인 것입니다.

유월절 페스티발을 하면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는 엄청나게 힘든 행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배를 하며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예배는 그저 부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부담이 되면 이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자유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서 자유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유를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을 묶어두려는 게 아니라 자유와 축복을 주려는 것이었고, 다윗의 회개에 이은 하나님의 축복은 죄에서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려고 했고 사도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그 예수 안에서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자유하면 방종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말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계속 자유의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는 자유의 메시지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는 결국엔 주 안에서 자유입니다. 이걸 보지 못하면 복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도대체 뭐가 복음인가? 뭐가 온 인류를 위한 복된 소식인가? 그런 질문을 던져본 후에 자유를 생각해 보면 자유의 값진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래 내용은 미주 중앙일보 2009년 10월7일 종교8면에 소개된 밝은터의 칼럼입니다. 자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2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히노끼
    2009/10/12 17:0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내적인 자유, 공감가는 내용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2. bkp
    2009/10/14 09:2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오늘은 그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육적인 묶임이 내적인 자유를 지배하는 날이었습니다.

BLOG main image
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305)
후원 (1)
운영자 소개 (1)
텔레비전 (12)
영화 (21)
음악 (10)
유명인 (26)
패션 (2)
스포츠 (62)
예술 (1)
게임 (3)
광고 (1)
안티 기독 (1)
엔터테인먼트 일반 (6)
문화 행사 (2)
仁터넷 (21)
Re-formation (38)
새벽 생각 (2)
짧고도 긴 생각 (69)
링크 (14)
사진으로 보는 세상 (3)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