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로마서 217-29

성경에 대한 오해

로마서 2장을 읽다보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잘못 읽으면 온통 행동을 잘하자, 실수를 하지 말자, 죄를 짓지 말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행동을 잘하고, 실수하지 않는 게 좋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2장을 쓴 사도 바울의 의도는 그게 아닌 듯합니다. 글을 쓸 때는 핵심 포인트가 있는데, 2장의 핵심 포인트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양심입니다.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속사람이 좋은 사람은 율법과 행동을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은 행동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양심 또는 속사람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관점으로 로마서 2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행동에 집중하는 우리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과 행동에 집중을 합니다. 로마서가 쓰여진 당시에도 율법과 행동에 대한 논쟁이 대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을 많이 알면, 행동을 잘하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이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지식사회에서 많이 공부한 사람은 귀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 신앙에 있어서 많이 배움이 신앙의 수준으로 여겨지는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크리스천 신앙에서는 속사람과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은 가르칠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게 참 역설적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격이 있는데 스스로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니 어쩔 수 없이 내세우는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역설로 가득차 있습니다.

지식인과 양심인

많이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많이 알 때 분별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이 자랑이 되면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을 남 돕기에 사용하면 그것은 옳지만 나의 안녕, , 명예를 위해 사용하면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셈이 됩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며 자신의 양심과 속사람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매순간 내 속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칭찬이 계속되면 내가 잘난 줄 알고 교만해집니다. 교만을 꺾는 훈련이 잘된 분들은 하나님께서 계속 쓰십니다. 그러나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는 사람은 결국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스스로 역행하게 됩니다 (로마서 222).

속사람을 살피셨던 예수님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신의 아들이었지만 속사람을 계속 살피는 자였습니다. 능력의 주가 잠 잘 곳도 없이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 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로마서 229).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쉽게 교만해지는지 우리 마음은 교만덩어리라는 암으로 덮히게 됩니다. 암이 전이능력이 좋은 것처럼 교만덩어리도 쉽게 온 마음으로 전파됩니다. 결국은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마음 지킴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를 칭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마음을 잘 지킨 자

마음을 잘 지킨 자는 의지가 생기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깁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 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고귀한 사랑이 담겨 있으면 되는데 우리 마음 밭에서 이런 복음이 튕겨 나가고 우리 중심적인 사고가 지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해야 하고, 우리가 선하고, 우리가 거룩해지고, 우리가 선교하고, 우리가 부흥시키고….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 중심적인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잘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역하고, 하나님의 부흥에 감격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온통 우리 영광에 삶을 도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한 결과입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 vs 빗 나가면 쌩고생

최근 한국에서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모 광고에 출연해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고 말을 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개고생이라는 표현이 자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리꾼들은 엄홍길 대장과 같은 존경받는 이가 이런 광고카피를 읊조리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개고생이라는 표현은 표준어라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나 고비가 닥쳐 톡톡히 겪는 고생'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 광고 카피를 패러디한다면 마음은 뒤전에 두고 행동과 율법에만 집중하면 개고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신앙이 빗나가면 고생

신앙이 빗나가면 정말 고생이 심합니다. 성경 말씀은 굴레가 됩니다. 모슬렘들이 그렇습니다. 꾸란은 그들에게 굴레입니다. 그들은 선한 행동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랬고 오늘날 유대인들도 그렇습니다. 고생이 심하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값싼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 지킴이 이뤄지면 그러한 행동은 대체로 따라온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광고카피를 빗나가면 쌩고생이라고 바꾸고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 지킴이 잘 안 됐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그를 격려하고 사도로 세우려고 노력을 하십니다. 그게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엔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행동만 봤더라면 배은망덕한 인간이지만 여전히 은혜를 허락하셨기에 그의 마음이 드디어 바뀌었고 결국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그게 성경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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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로마서 21-16

신은 없다?

어제 쓴 글의 댓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안다'구요?? 당신은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그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 추가할 게 있습니다. 그분에게 신은 없습니다. 신을 경험한 자에게 신은 있습니다. 니체에게 신은 없지만 테레사 수녀님에게 신은 있습니다. (주: 니체는 신이 없다고 말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신이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고 말한 것임). 버트란드 러셀에게 신은 없지만 그의 딸(목사의 아내)에게 신은 있습니다. 신은 관계적입니다. 신은 기능적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신은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신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관계는 이성으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지만 신의 존재를 알려면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글 자체는 이성이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신과의 영적인 교류가 이뤄지면 성경은 관계를 맺어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 세상의 일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게 관계에서 이뤄지지 무엇을 많이 안다고 이뤄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해가 전파되어 우리가 머리로 알 수 없는 신을 머리로 알게 끔 프로그램화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원래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을 바탕으로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이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지나치게 부풀려졌습니다.

신을 인정하는 양심

    사도 바울은 로마서 214절과15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어서 그것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게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덕과 율법이 필요할까요? 이는 아마도 인간이 양심만으로 버티기에는 죄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덕과 율법이 없으면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이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율법 없이도 율법을 실천합니다. 양심으로 살기에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돕지 말라도 해도 돕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도 한국인들 중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심 또는 신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그 양심이 더욱 다져지고 강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치고 민초를 위해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버트란드 러셀도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사위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비를 지원했는데 이는 양심에 바탕을 둔 행동입니다. 이성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될 분이었습니다.

양심을 가리는 교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질을 받을까요? 첫째는 양심을 실천하며( 2:13)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생기는 부조화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가 나쁘지는 않지만 덩치가 커지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내가 알려질수록 피할 수 없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그런 것과 패키지로 따라온다.” 교회가 크건 작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으로 회복하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양심에 털났다

    양심에 털났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털이 나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근본 양심은 이것을 압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압니다. 믿는 자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원래의 양심에 성령까시 합세하시니 괴롭습니다.  이 때 우리는 두 가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남 탓하는 것입니다. 내 털난 양심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남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를 합니다. “, 내가 이렇게 양심에 털이 나 있구나.”하고 말이죠.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로마서 24).  그 용서와 인자하심을 깨달으면 내 양심도 회복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자는 결코 신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이 없이는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정신적인 문제로 해석하더군요.

앤서니 김의 양심 회복

   신의 존재를 거부하더라도 죽음과 고통 앞에서는 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LA 2009 412일자 스포츠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골프 선수 앤서니 김에 대한 기사입니다.

    앤서니 김은 경기 후 소감에서 "대회 첫 날 75타로 부진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9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LA 에인절스의 유망주 투수 아덴하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읽고 골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앤서니는 "기사 맨 마지막 문장에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22살이라고 해도 말이다. 때문에 매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야 된다'고 써 있었는 데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 평생 꿈이 매스터스에서 한 번 쳐보는 것이었다. 사실 인생에서 보기나 3퍼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여기 나와서 골프를 친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기쁨이라는 걸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오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해서 버디 11개를 잡은 것 같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원문 기사 보기]

    남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안에 있던 양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원래 그 안에 있던 양심은 스포츠를 통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에서 주는 메시지가 온통 성공, 승리, 돈이니 그의 양심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죽음과 육체적인 고통은 메가폰 역할을 합니다. 양심 메가폰.  양심 메가폰을 든 존재는 바로 신입니다. 신이 없으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 양심을 작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에 털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우리에게 다가올 게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신의 심판입니다 (2:5). 그럼에도 심판권이 있는 신은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려주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2:4). 기회는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털난 양심을 계속해서 제거합시다. 죽는 그날까지.

적용

    개인적으로 양심에 꺼리끼는 일이 많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다 내놓고 양심 회복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심어주셨던 그 양심. 홀가분하지는 않다. 여전히 내 안의 양심이 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오늘 그 털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 종일 회개의 기도를 하고 싶다.

Think Deeper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바로 그런 깨끗함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주여, 깨끗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깨끗함과 정직함의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함의 능력이 아니라 깨끗함에 대한 갈망입니다. [김동호 목사, ‘깨끗한 크리스천’,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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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2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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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 2009/04/12 10:0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주의 은혜라!
  3. 2009/04/12 10: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렇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고 순결한 크리스챤이기 위해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하는 악순환만 연장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고 자백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은혜를 주셨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계속 순결하고 깨끗해 지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 보다 잘 되질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을 네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지키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고 순결한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나 그 생명이 약하면 안됩니다.
    생명을 살리리고 강하게 하려면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자백하여 나의 모습을 인정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매일 매시간 매분 말씀으로 우리의 생명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4. 2009/04/12 17:1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오늘 설교 말씀을 듣는데 예수님의 끊임 없는 용서와 격려가 베드로를 살렸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실망했고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끝까지 이해하고 격려하고 부활 후에 세워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부활의 핵심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참으로 은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발버둥칠 때는 안 되는데 성령의 에너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강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결단이지만 그렇게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성령 전체에 흐르는 Theme입니다. 내가 하려고 해서 잘 되면 교만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 2009/04/12 23: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내가 하려고 함은 주님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은혜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된 생명은 강력 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강력하다면 우리는 또,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할 필요성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강력하다면 우리는 바로 변화되고 거룩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으로 부활된 생명은 "강력하다!" 보다는 "우리는 말씀의 양식으로 강력하게 할 필요가 있다!"가 필요합니다. 아멘!
      우리가 매일 매일 주의 말씀을 먹어 부활 생명을 더 강하게 하길 원합니다.
  5. 2009/04/13 00:4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멘!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6. Joe Yang
    2009/04/19 08:5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Think Deeper가 Think Looser로 흔들리면서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것 같아서 석연치 않습니다.

    '깨끗함에 대한 갈망'은 이런 대화의 광장에서 남의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의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을 또 발견하면서 더-더 씻어지기를 바랄뿐 아니라,

    남의 그런 모습도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끼어(?)들어서 함께 깨끗해지려는 안타까움이 '깨끗함에 대한 갈망'이라는 뜻으로 새김질하면서 다시 한번 더 글을 읽으면서 기도합니다.
  7. 2009/04/19 15:5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의견 감사합니다. 그 글을 올린 의도는 깨끗함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해질려고 해도 깨끗할 수 없는게 깨끗함이라는 정의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중심에 내 생각, 내 정의, 내 의가 있을 때 그것이 깨끗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도 내 생각, 내 정의, 내 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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