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교회에서는바울이칭찬을많이하고덕담을자주합니다. 물론덕담만있는것은아닙니다. 성숙한교회가더성숙해질수있도록권면의내용도있습니다. 그러나미성숙한교회에대한권면과는크게차이가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들고 신앙의 후배들에게 ‘지적’을 하면 후배들은 ‘자유’를 얻는 대신 굴레가 됩니다. 로마서 15장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이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인내, 위로, 소망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성경을 들고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지적을 하고 엄포를 놓고 심지어는 협박을 합니다. 이단은 바로 성경을 협박의 도구로 사용하는 집단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성경을 도구로 씁니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자유를 주는 책이 아닌 굴레로 만드는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위로가 되고 자유를 체험하고 소망을 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진 짐에 더 짐을 보태는 느낌이 든다면 이는 성경을 잘못 알려준 탓입니다. 물론 거룩한 부담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수가 짊어지셨던 거룩한 부담을 우리는 어느 정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경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의 아픔을 말할 수 없을 때 성경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있기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있기에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위로와 소망이 없다면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위로의 존재가 아니라면 얼마나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부담과 엄포와 지적으로 가득한 설교를 듣다보면 듣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담주려고 이 책을 남기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위로 받으라고, 읽으면서 하나님이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남기신 것입니다. 성경은 친절한 선생님, 친절한 멘토입니다. 성내고 화내는 선생이 아닙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겠습니다. 관점을 바꿔야겠습니다.
로마서 12장20절에 보면 머리 위에다 숯불을 쌓는 셈이 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머리 위에다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행위라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 풍습에는 머리에 숯불을 담은 통을 지고 다니는 것은 회개를 표시하는 행위였는데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성경 주석가들은 설명합니다.
맨 머리에 숯불을 붓는 게 아니라 숯불을 담는 통(왼쪽 사진)이 있고 이 통 위에 숯불을 부어주는 것이 원수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다는 게 사도 바울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숯불을 부어주는 것은 선의라는 뜻입니다. 숯불을 받은 사람은 실질적으로는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고 상징적으로는 은혜를 경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 숯불을 붓는 것에 대한 한국적인 전통이나 상황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우면 더 잘해준다는 의미죠.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더 잘해주는 게 현명한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좋은 결과가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숯불을 받은 원수 또는 미운 자식이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은혜의 행동을 한 사람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받아들이면 손해보는 쪽은 원수가 아니라 그를 원수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미운 자식을 미워하기만 하면 손해보는 쪽은 부모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들끓는 이유는 원수를 원수 취급하고 미운 자식에게 비난만 퍼붓기 때문입니다. 달래면서 참회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요즘 북한 핵무기가 세계적인 관심사인데, 그렇다면 ‘미운 자식’인 북한에 떡을 더 주는 게 현명한 것인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숯불을 붓는 게 현명한 일인가 적용을 해봅니다.
북한에 떡을 실어 날랐던 분들은 어쩌면 이 성경 내용을 보며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떡만 줬으면 좋았을텐데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자금을 준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핵미사일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최악의 무기입니다. 원수와 화평하기 위해 인류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저 북한 주민을 위해 음식을 갖다주고 추운 사람이 있으면 따뜻하게 해주고 했어야 하는데 달러를 갖다줬으니 원수는 엉뚱한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붓는 것과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내용을 읽으며 우리는 화평과 평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화평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정당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라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마치 원수의 머리 위에 통이 없는데 뜨거운 숯불을 붓는 것, 미운 자식에게 떡 대신 엄청난 유산을 상속하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로마서 12장9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저는 어떤 적용을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수 또는 불편한 사람과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리수를 두고 화평을 도모했더니 오히려 엄청난 핵폭탄을 맞게 된다면 그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수준에 맞게, 내 그릇 크기에 맞게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장13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 라고 나오는데 손님 대접하기도 내 수준과 상황에 맞게 해야 화평이 있는 것이고 기쁨이 있는 것이지 그 말씀을 이행하겠다고 무리수를 두면 엄청난 부정적인 결과가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 같습니다. 18절에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 능력만큼해야 한다는 의미 같습니다.
“폼 좀 잡지마!”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에서 폼 좀 잡으라는 말이 유행했으면 합니다. 폼 좀 잡으세요! 무슨 말이냐구요? 이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야구에서 폼을 바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구에서 투수가 폼을 바꿨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폼을 바꿀 때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인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우리는 살면서 세상의 폼에서 예수의 폼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 폼을 바꾼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폼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냥 유지됩니까?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박찬호 선수가 폼을 바꿨다고 가정합니다. 그 폼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훈련이 없으면 바뀐 폼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폼으로 바꾼 후에 계속 훈련을 받지 않으면, 훈련을 하지 않으면 다시 옛날 폼으로 돌아갑니다. 제대로 된 폼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이 잘 될수록 훈련이 길어질수록 폼은 안정됩니다.
폼이 안정된 선수는 안정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안정된 폼을 유지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안정을 유지합니다. 결국 훈련이 잘 되고 있고 훈련이 현재 진행형이면 폼을 계속 유지하지만 훈련을 안하고 그것이 현재 진행형이 아니면 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 같습니다.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유도 선수들을 취재한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상에 나오는 내용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는데요 두 가지가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1. “사람이 사람을 메치는 것은 예술이다”:그 말이 예술인 것 같습니다)
2. “땀은 배신하지 않으며 흘린 땀의 무게는 정확히 안다.”
3. “훈련은 산수와 같다. 하루를 쉬면 내 몸이 알고 이틀을 쉬면 상대가 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3일 이상 쉬면 상대가 상대해주지 않는다.
이 영상에 나온 말 중에 이들은 올림픽의 영광을 위해 땀을 흘린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 얻는 그 영광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요. 열심히 훈련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큰 영광인 하나님 나라가 있는데도 그 영광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라고 나옵니다. 유도 선수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몸을 올림픽의 영광을 위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듯이 훈련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삶의 모든 것을 저 선수들보다 더 열심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하늘의 영광을 위해 저 선수들처럼 열심히 훈련했나?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올림픽의 영광보다 더 낫게 취급했던 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저보다 좀 더 낫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2장2절에 보면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나옵니다.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를 영어로 보니. Do not conform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con은 함께하는 의미고 form은 아까 내가 나눴던 그 폼입니다. 폼을 함께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의 폼을 따라하지 말고 예수님의 폼을 따라하라는 의미입니다. 2절을 계속 보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변화를 받아서를 영어로 찾아보니 transform이라고 나옵니다. trans는 change라는 의미인데 즉 폼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폼으로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폼을 바꿨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폼을 바꿨습니다. 제가 폼을 바꿨습니다. 이 바뀐 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바로 훈련입니다. 계속 연습을 해야 합니다. 폼은 바뀌었는데 훈련이 없으면 바뀐 폼은 흐지부지해집니다. 예수의 폼으로 바꾼 우리는 훈련을 계속할 경우 폼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뀐 예수의 폼을 유지하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오래전 저는 훈련을 잠시 게을리했더니 잠시 폼을 잃을 때가 있었습니다. 지난 1년 5개월 동안 그 폼을 되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폼을 잃었다가도 다시 찾는 것을 반복하는 요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훈련을 해야하는 것인가요? 각 사람의 능력의 분량만큼 해야 합니다. 내 수준보다 지나치면 부상을 입게 됩니다. 물론 부상을 당해도 유도 대표팀의 안병근 감독은 계속 훈련을 받게 하겠다고 합니다. 심한 부상이 아니면 계속 훈련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저런 훈련을 시키면 견뎌내겠습니까? 국가대표 유도 선수들이기에 저런 훈련을 버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자신이 맡은 분량이 다릅니다. 적어도 그 분량만큼은 훈련을 받고 일을 해야 하는데 만약 분량만큼 하지 않으면 무리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을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인데 국가대표 훈련을 받겠다고 하면 쉽게 부상을 당하거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국가대표급 신앙인인데 훈련을 받지 않고 빈둥대면 그것 역시 자신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해가 됩니다.
자신의 분량에 맞게 훈련을 받고 믿음 생활을 하고 일을 한다면 그 공동체는 아름다운 공공체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훈련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분량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낮게 잡아도 곤란하고 너무 높게 잡아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로마서 12장 4절부터 8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의 폼을 가졌던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폼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 폼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훈련을 받습니다. 그 폼을 유지하면서 우리에게 각자 맡겨진 사명들을 우리는 실행에 옮깁니다. 그 결과는 다양합니다. 우리 유도 선수들이 열심히 훈련을 받았지만 결과가 달랐던 것처럼 말이죠.
유도 선수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올림픽 꿈의 무대에 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고.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폼을 잡은 것으로도,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더 좋겠습니다. 저기 나온 유도 선수들이 기왕이면 좋은 결과를 내줬으면 하는 게 우리의 바람입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우리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폼을 갖길 바랍니다. 예수의 폼으로 바꾼 후에 훈련을 받길 원합니다. 훈련을 받지 않으면 자칫 예수의 폼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과 여러분께 도전합니다. 예수의 폼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저들 유도 선수 못지 않은 훈련을 받겠다는 각오를 갖길 바랍니다. 훈련 도중 우리는 실수할 수도 있고 훈련 루틴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훈련을 다시 받겠다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저는 평생을 훈련 받는다는 각오로 인생에 임하기로 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라는 생각은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 정도면 될 일은 없습니다. 훈련이 없으면 폼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기 폼을 잃어버립니다. 올림픽 유도 선수들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국가대표가 될 수 없습니다. 단 며칠이라도 빠지면 국가대표급 선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도 선수가 하루를 쉬면 내 몸이 알고 이틀을 쉬면 상대가 안다고 말한 것처럼 저도 묵상 훈련, 기도 훈련 등을 하루라도 쉬면 비슷한 현상이 일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꼭 묵상 훈련을 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각자에게 훈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폼을 다시 잃어버리고 세상의 폼을 갖게 된다면 사단은 아예 우리를 건드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계속 실수하고 넘어지는 때도 있겠죠. 그러나 오뚝이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계속 훈련받고 실수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도 선수들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로마서 10장에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당시 사회를 생각해 봅니다. 구원이 간단해 보이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를 고백함으로 체포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함이라는 놀라운 선택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하는 것,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이 예수를 부인하면 풀어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바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입으로 고백하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한들 법적으로 제재받지 않습니다. 후기 산업사회 또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가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삽니다. 정말 원하는 어떤 정보든 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도 널려 있습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인류학적으로 분석된 자료가 인터넷에 풍성합니다.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 선택 중에 하나를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나오는 정보에서 발견하는 예수
지식 사회를 거친 우리가 그 정보를 마음 속으로 잡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인류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도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그 정보를 잡은 사람이 바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정보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고, 마음에 너무나 진하게 믿겨지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원시 사회나 농경 사회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충분한 정보가 없는데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 사회에서도 전해졌습니다. 제한된 정보이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정보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선교인 것입니다.
선교라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이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못 들은 이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도 믿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믿음이 형성이 될 수 없는 여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교사들이자 복음 전도자들이 잘 못 전해서 믿음이 형성될 수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식 사회, 산업사회,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정보는 충분합니다. 그 정보를 듣는 자가 잡느냐, 잡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쉬운 것 같은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어령 선생 같은 지식인이 예수 복음을 어떻게 잡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올바른 댓글 문화란 무엇일까?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4월부터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생각한 것이다. 과연 올바른 댓글 문화는 무엇일까? 댓글을 왜 다는 것일까? 댓글은 왜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가장 문제 있는 댓글은 역시 악플이다. 글 내용과 상관 없이 글 쓴이와 글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비방..
율법이 강조되면 사회가 건강해지고 룰을 잘 지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그 사회에서 떠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인데 정작 율법만 주인노릇하고 하나님은 없다니 말이죠. 사람이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니 더욱 힘들어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는 것에서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국은 율법을 강조하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유교의 영향도 있고 기독교가 들어가서 율법을 많이 강조하면서 유교와 기독교가 합세(?)해 율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 결과는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율법이 강조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게 되고 그러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율법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해 의에 이르는 자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다고 지적합니다. 율법으로 의에 이르는 것은 내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칭송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9장 후반부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 독자들에게 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생을 율법에 의지하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킨 사람만을 칭찬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비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9장24절에 하나님은 비유대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것
사도 바울은 로마서 내내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은 사실 마이너이고 정말 중요한 메이저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고 그를 인정해야 하고 그가 꾸준히 참으시고 너그럽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면 항상 나오는 말. “그래도 율법은 중요하다. 계율을 지켜야 한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결코 아닙니다. 질서를 위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게 사도 바울 말의 핵심입니다. 계율을 지키고 룰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음으로 몰고가는 경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잘 지키면 믿음이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믿음은 믿음으로 설명해야…
믿음은 믿음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와 이론으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입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이론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체험과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설명을 하고 율법도 만들어 시험도 하고 하지만 사실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음은 제한되게나마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악마’라는 영화가 개봉됩니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라는 전체 그림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밀결사대와 교황청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교회는 역사를 통해 너무 많은 틀을 만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봤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문자 안에 담긴 비밀, 문자 안에 있는 뜻, 문자 안에 있는 믿음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가르쳤을 때 반드시 적대적인 그룹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알려줬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천사와 악마는 그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게 교회의 잘못은 아닙니다. 어둠의 영이 강력히 역사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로운 하나님, 참으시는 하나님을 전하지 못한 것은 기독교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너무 율법으로 묶어둔 것이 실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 하심을 우리가 너무 제한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궁금점과 인생의 의문점을 해결해주셨기 떄문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 그 말이 왜 맞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논쟁 속에서도 여전히 '오직 예수'가 우리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인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에 불편해 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얕아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 천당’과 같은 표현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오해가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오직 예수’에 대한 오해를 나눴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 천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를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무시하는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를 체험하셨습니다. 육의 몸으로는 인간이 죄를 질 수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구원을 허락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한 자에게 구원의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인정한 자에게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받을 때 아들이 “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아버지는 재산을 상속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미 아버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음에도 뭐가 뒤틀렸는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자녀가 된다면 하늘나라를 상속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8장24절을 보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뭐냐하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을 때 우리 마음에 소망이 생기는데 그것이 곧 하늘나라로 가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함축한 게 ‘예수 천당’입니다. 소망을 갖게 되면 죽음의 몸에서 사는 우리가 꿈을 품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구원은 이뤄간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구원은 한 번 받으면 끝이 아니라 이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진행적인 느낌이 있는 단어이지 단발성 느낌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소망을 품고 가는 게 우리의 몫이라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입니다. 확실히 딱 정해진 게 없기에 그 소망을 품은 자는 힘들게 살아갑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소망을 품은 자는 물질중심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연약한 몸이 있기에 물질을 무시하거나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고난이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같습니다.
올림픽 메달을 향한 소망 비유
올림픽 금메달 획득의 꿈에 부푼 자가 편히 살다가 메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그 선수에게 소망입니다. 소망을 품고 먹고 싶은 것 덜 먹고, 잠 덜 자고, 하고 싶은 것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도 비슷합니다. 그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는 선수에게 코치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성령이라는 코치가 있습니다. 우리를 훈련하면서도 우리의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성령입니다. 힘들지만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천당’에 함축된 뜻입니다. 천당에 쉽게 가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는 자에겐 코치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예수 천당의 진정한 의미
‘예수와 천당’ 사이에는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 OOOOOOO천당’이라고 할 수 있죠. 공란을 채워볼까요? ‘예수(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환경을 아시고 구원하신 그분을 믿는 것은 믿음의 출발이고 그 믿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코치(성령)와 함께 가는 길에서 그 소망의 종착역은 바로) 천당!’
‘오직 예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이 들으면 거북한 표현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을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오직 예수’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낸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문화적 물질주의(Cultural Materialism)로 인해 물질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위로를 찾기 힘들고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왜 소망이냐 하면 자신의 엄청난 권한(신의 아들)을 내려놓고 십자가 처형을 당할 정도로 우리를 생각했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로 판단한다면 그의 행동처럼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비효율에서 나옵니다. 효율적이지 않는데 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일은 비효율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 선교도 효율적이지 않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왜 할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효율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계산기 두들기며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비효율을 감당하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수잔 보일의 비효율성
비효율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수잔 보일입니다. 브리티시 탈렌트 쇼에 출연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물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40대 가정주부가 엄청난 노래실력으로 전 세계 1억 명의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준 인물입니다. 그가 노래를 배우기 위해 투자한 것들은 과연 효율일까요? 비효율일까요?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 참….” 그러면서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효율적인데 계속 밀어부치는 이유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은 효율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효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비효율입니다. 예수님은 비효율입니다. 사랑 하기에 비효율을 선택한 것입니다. 효율이 고개를 들고 말합니다. “그건 아니지…” 사랑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상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효율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비효율을 받아들이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그 비효율의 대표주자가 예수님인 것입니다.
과정의 비효율성
저는 수잔 보일의 대성공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가 그렇게 되는 길에서 보여준 과정을 생각합니다. 그 과정은 분명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그는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비효율적이면서 미련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저렇게 할까?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효율의 덫에 묶여 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비효율적이면서 무한한 사랑을 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입니다.
적용
내가 하는 일들은 모두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잔 보일처럼 세상이 알아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일들을 하면서 예수님의 비효율성을 배운다.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힘들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7장은 의미심장한 장입니다.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엉뚱한 메시지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마서 7장에는 율법(the Law)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율법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설명됩니다.
율법을 생명체처럼 느끼게 설명
사도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경건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생명체 노릇’을 하는 것은 돋보이려면 우리의 죄가 환히 드러나야 합니다. 죄가 안 드러나면 율법은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인생에서 장점이 곧 단점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온전하지 않는 이유는 제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죽기 전까지만 필요하고(로마서 7장1절) 문자(로마서 7장6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살아나면 나는 죽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나의 죄가 드러나야 율법의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필요하면서도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역설적입니다.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나에게 독이 될 수 있고, 나에게 독이 되는 사람이 나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문명은 인간을 편하게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처럼 인간 사회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완벽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
우주에서 완벽한 존재는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온전한 존재를 섬기는 방법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입니다 (로마서 7장6절). 율법에 자유해져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 때 인간의 삶은 점점 온전해집니다. 점점이라는 말은 한 번에 온전해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죽는 날까지 차츰 온전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를 져야 돋보이지만 성령은 우리가 온전해질수록 빛이 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거룩하지만 인간과 연관을 짓게 되면 죄를 드러나게 합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도 거룩하고 인간과 연관지어지면 죄를 녹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율법이 살아나려면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죽어야 했기에 인간은 율법과 처절한 씨름을 해야했습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 율법과 씨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굴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렇지 않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전문가
성령이 함께 하면 인간은 거룩에 가까워집니다. 율법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가 이뤄지지 않으면 다시 죄성이 살아납니다. 이때 율법이 들어와서 우리를 얽매게 됩니다. 율법은 불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는 전문가입니다. 우리는 율법과 성령을 오가며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합니다. 법은 우리가 일정 속도 이상으로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두었습니다. 그 법이 드러나려면 우리가 속도 위반을 해야 합니다. 그 법이 필요없지는 않지만, 질서를 위해 필요하지만 법의 역할은 우리의 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속도 계기판은 성령과 같은 존재
자동차 안에 속도 계기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운전하는 속도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계기판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운전 법률은 우리에게 속도 위반의 죄를 인식하게 해줍니다. 성령은 속도 계기판처럼 우리의 상황을 알려주지만 우리를 죄의식으로 몰아넣지는 않습니다. 그 존재의 역할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율법은 운전 법률 같아서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해줍니다.
율법은 엄격한 선생이라면 성령은 따뜻한 엄마같습니다. 우리는 제한된 존재이기에 두 가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 엄격한 선생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따뜻한 엄마만 있으면 됩니다.
엄격한 선생과 같은 우리 사회
우리 사회는 엄격한 선생과 같습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모두 손가락을 들고 삿대질을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잘못을 안 한 척하고 삽니다. 교회를 가면 모두 거룩하게 보입니다. 아무 문제 없이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엄격한 선생에게서 훈련 받은 결과입니다. 간혹 따뜻한 엄마의 사랑이 충만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엄격한 선생의 훈련을 받고 멀쩡하게 앉아 있습니다. 잘못을 드러내면 지탄을 받기에 문제가 없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왜 자살을 선택합니까? 얼마 전에는 영국의 한 배우가 자살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엄마를 경험하지 못해서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배우 최진실 씨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이 사회에 너무 엄격한 선생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엄격한 선생일 뿐인데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율법인 것처럼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율법 하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입니다.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 합니까? 이런 말을 하면 정의로운 분들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정의는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성령은 따뜻한 엄마와 같아서 죄 많은 자식도 다 품에 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으면 사실 이 사회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안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을 하면 그것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따뜻하게 품어줄 엄마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습니다. 그는 유일한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적용
사람을 볼 때 성령의 마음으로 본다. 나를 볼 때는 율법의 잣대로 때론 필요하다. 나는 유한한 존재이니까. 사람을 볼 때 율법을 들고 보면 어울려서 지낼 사람이 있겠는가. 성령의 마음으로 봐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끔 율법의 잣대도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100m 달리기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습니다. 100m 달리기를 믿음으로 시작한다는 비유를 로마서 앞에 장에서 나눈 바 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을 끊고 달리면 영광, 환난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0m부터 100m까지 별의 별 일을 다 겪습니다. 달리는 중간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죄를 지음),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병에 걸림),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끝까지 무사히 잘 달릴 수도 있습니다. 피니시 라인까지 가는 중에 환호를 받게 됩니다. 영광이 분명 있습니다. 박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끄러지면 어떻게 합니다. 다시 출발선으로 가서 달리기를 해야 합니다. 다음 경기가 있듯이 다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믿음으로 출발한 이의 최종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든 피니시 라인을 향해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한 이는 영원한 생명이 이르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목적지는 너무나 명확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쓰러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결국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믿음 있어도 죄는 짓는다
이 비유를 마음에 품고 로마서 6장을 읽으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분명 죄를 짓습니다. 중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 출발한 자와 다른 점은 믿음으로 다시 출발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출발한 자는 넘어지는 것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계속 넘어져도 무감각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같이 넘어졌는데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같이 넘어져도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노예로 있는 자와 의의 종으로 있는 자의 다른 점입니다.
의도적인 죄인?
넘어져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 의도적으로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 잘 뛰면서 피니시 라인을 잘 통과하려고 합니다. 아무렇게나 뛰려고 하는 사람은 죽은 육상선수입니다. 죄 아래서 죽은 자와 같습니다. 대부분 육상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뛰려고 합니다. 특히 믿음을 가진 자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뜁니다. 그래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잘 뛰었는데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레이스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비유가 잘 이해가 되십니까?
정리를 하면 100m 달리기를 할 때 아무렇게나 뛸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마음 놓고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열심히는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보다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하나님의 의를 품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립니다. 아무렇게나 뛰는 사람은 중간에 넘어지면 레이스를 그냥 포기합니다. 열심히 뛰는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은 자는 다시 출발점으로 가게 되어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출발과 과정과 마무리가 모두 다릅니다. 겉모양은 같아 보이는데 내막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자
오늘 사도 바울이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믿음으로 출발한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은 자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자는 넘어져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습니다.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에는 피니시 라인을 통과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가는 사람입니다. 중간에 실수도 있고, 죄도 짓고, 넘어지고, 영광도 있고, 박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방향성이 너무 정확합니다.
자, 여기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결론 짓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서 6장23절). 하나님의 선물은 바로 그의 은혜를 깨닫는 것, 그가 보내신 이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00m 달리를 하는 중에 겪는 경험은 믿음으로 출발한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내면에서 다른 게 분명 있습니다.
적용
나는 100m 달리기를 하면서, 중간에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영광의 박수를 받기도 했고, 욕을 먹기도 했고, 부상도 당하기도 했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다. 나는 다시 믿음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믿음.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믿음. 또 넘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선다. 나는 빛의 자녀이니까.
Think Deeper
진리도 마찬가지다. 오직 진리를 따를 때에만 진리를 알 수 있다. 쪼개고 따지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오히려 진리를 진리답지 못하게 한다. 진리는 확고하고 장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로 부르지 말고 우리가 직접 진리를 향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정의하려고 시도한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p.278>
믿음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 세상에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은혜, 그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순 진짜 믿음’은 바로 그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합니다. 이상하죠?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런데 이런 것은 체험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체험을 하면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김구라 씨의 잘못 인정
요즘 한국 연예계에서는 김구라라는 개그맨이 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인터넷 방송에서 온갖 욕지거리를 하다가 뜨게 되어 공중파 방송으로 왔고, 솔직한 대화법으로 인해 많은 팬을 확보했습니다. 인터넷 방송 시절에 자신이 욕했던 스타들을 찾아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방송에서의 쇼맨십이라고 할지라도 보기에 좋았습니다. 실제 미안한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니 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인터넷 방송 시절 실컷 욕했던 가수 문희준 군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화해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구라 씨의 죄는 동료 연예인들을 욕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잘못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뜻을 무시하고 내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동료 연예인을 욕한 김구라 씨보다 더 큰 죄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만든 신을 무시하는 것. 자신을 보호해주는 신이 없다고 하는 것. 내 잘난 맛에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다고 말하십니다. 용서를 구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구할 때를 말합니다. 진심인지 아닌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열매는 화해와 평화입니다. 화해가 있으면 평화가 있으면 절친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금세 친해질 수 있습니다.
영광과 환난은 함께 한다
용서를 받은 자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김구라 씨는 지금 인간적인 면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 상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는 더 큰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영광의 자리가 쉽습니까? 김구라 씨가 유명해져서 돈을 잘 벌고 명예를 얻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분명 그만큼의 불편함이 있을 것입니다. 인내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공인이 되었기에 말과 행동을 이전보다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김구라 씨는 여전히 다른 연예인보다는 말을 쉽게 하는 편이지만 인터넷 방송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입니다. 하나님과 절친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광이 있지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3절).
이 땅에서는 영광과 환난은 함께 합니다. 절반의 천국 생활이라고 할 수 있죠. 다가올 천국에서는 완벽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자살을 선택했던 연예인들은 바로 영광과 환난에서 영광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영광과 환난은 항상 함께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평화가 있습니까? 그럼 곧바로 혼란이 찾아와 친구하자고 합니다. 내 삶에 영광이 있습니까? 환난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안에서는 싸우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왜 환난을 겪는가?
환난을 잘 견뎌내면 인격이 단련이 됩니다.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게 됩니다. (로마서 5장4절).100m 달리기 비유를 기억하시나요?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믿음으로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중간에 가다보니 지칩니다. 힘듭니다. 다리가 아픕니다. 영광도 있습니다. 평화도 있습니다. 그것을 잘 인내하면 피니시 라인에서는 완성된 인격을 얻게 됩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인격은 얻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스타트 라인으로 가서 다시 뜁니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삶이 너무나 고단하고 힘듭니다. 믿음으로 출발했는데,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고민하게 됩니다. 환난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우리가 믿음으로 100m 달리기의 출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영광과 환난을 거칩니다. 환난에서 대부분 포기합니다. 어떤 이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다시 믿음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믿고 출발을 했나 생각을 해봅니다. 믿음이면 됐지, 믿음이면 됐지 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또 무너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출발선으로 갑니다. 육상 경기에서는 중간에 포기하면 탈락하지만 하나님은 계속 기회를 주십니다. 믿음만 갖고 있으면 됩니다.
적용
삶이 고달프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이 힘들다. 하지만 믿음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중간부터 뛰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뛴다. 믿음의 출발선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
Think Deeper
사람에게 주리고 세상에 주린 것은 내가 주릴수록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비참한 목마름과 주림만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인생의 목적, 결혼의 목적이 거룩이라는 것을 알고 그 거룩을 원할 때 주님이 내 인생도 가정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굶주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김양재, “큐티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P.183>
지난 밤에 꿈을 꿨습니다. 저는 집 문 앞에 서 있었고 하나님은 저에게 아들 세 명 중 한 명만 집 안으로 들여 보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들의 마음 가짐을 살펴본 후에 들여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왜 꼭 1명일까 3명 다 들여보내면 안 될까 하고 생각하면서 아들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이 집으로 들어올 자격이 어떻게 있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아들은 말합니다. “저는 밖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요. 착한 일도 많이 했구요. 당연히 집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은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세상이 다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아버지는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 아들이 말합니다. “저는 온갖 범죄를 다 저질렀어요. 죄송해서 아버지. 부끄러우시죠. 그런데 저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아들이 두 명이거든요. 갑자기 아들이 세 명이 됐고 아들 중 한 명만 집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꿈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입장에서 세 번째 아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아들이 집에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자는
잠에서 깨어 로마서 4장을 읽는데 세 번째 아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보다는 당신을 중심에 두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인간의 업적은 하나님께는 그닥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 우주에 큰 변화가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업적은 인간들만이 박수를 치는 일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잘못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게 잘못됐다는 말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흑백논리를 펼치시는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죠. 무엇을 더 우선시하느냐의 문제입이다.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똑같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저는 불의합니다. 저 같은 자를 의롭게 하시려는 주님을 이 세상의 중심에 두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5절). 단순히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 자를 찾는 것이죠.
하나님의 커트라인은 믿음
인생을 열심히 살았고 많은 업적을 쌓은 분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았고, 많은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둔 분들은 물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분들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둡니다. 내가 잘나서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품삯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로마서 4장4절).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쓰는 의도를 파악하시겠습니까? 로마서 3장 나눔 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커트라인을 믿음으로 두셨습니다. 공로,. 행함, 업적은 보너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공로, 행함, 업적은 헛고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봉은 없고 보너스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과 행동을 강조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장25절)
믿음과 100m 달리기 비유
우리의 의로움은 믿음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로마서 3장에서 나눴던 ‘순 진짜 믿음’입니다.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공로, 행함, 업적, 도덕, 율법을 중요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믿음을 더 우선으로 두셨다는 것 입니다. 이 모두가 연결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피니시(finish)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100 m 달리기를 합니다. 피니시 라인을 10초로 통과했습니다. 대단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중간부터 뛰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점이 다르면 10초 기록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대단한 기록이지만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100m를 15초로 통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출발을 제대로 했고 좀 늦지만 피니시 라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대기록은 아니지만 기록은 인정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출발도 제대로 하고 피니시도 잘했는데 빨리 달리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습니다. 이것은 부정 레이스가 되고 기록은 모두 박탈됩니다. 여기서 100m 달리기의 출발점은 믿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기록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서 잘 마치면 늦든 빠르든 기록은 인정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출발되지 않으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기록은 박탈당하게 됩니다. 업적, 공로는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100m 경기에서 부정출발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시 출발하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업적, 공로, 기록은 다 무시하고 다시 출발하길 바라십니다. 믿음이 바로 그것인 것 같아요. 정당한 출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바로 정당한 출발을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정당한 출발을 할 때 100m 기록이 인정되듯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니시 라인을 좋은 기록으로 통과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적용
내가 부정출발을 했을 때 하나님은 나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이 나에게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원점으로 돌리셨던 하나님, 나는 그분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삶에서도 나는 부정출발을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믿음으로 출발해야 피니시 라인에서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출발하고 있는지, 내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Think Deeper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새롭고도 철저하게 행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사건들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깥’이나 ‘위’에 계신 하나님은 많은 세속적 조직들 속에 묻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면에 계신 하나님께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밖에 계신 하나님이 사랑의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경험될 수 있는 것처럼, 내면에 계신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적 생명의 원천일 뿐 아니라 태초의 혼돈처럼 엄청난 혼돈의 원인일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상처 입은 치유자,’ P.55>
“신은 없습니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안다'구요?? 당신은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그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 추가할 게 있습니다. 그분에게 신은 없습니다. 신을 경험한 자에게 신은 있습니다. 니체에게 신은 없지만 테레사 수녀님에게 신은 있습니다. (주: 니체는 신이 없다고 말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신이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고 말한 것임). 버트란드 러셀에게 신은 없지만 그의 딸(목사의 아내)에게 신은 있습니다. 신은 관계적입니다. 신은 기능적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신은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신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관계는 이성으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지만 신의 존재를 알려면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글 자체는 이성이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신과의 영적인 교류가 이뤄지면 성경은 관계를 맺어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 세상의 일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게 관계에서 이뤄지지 무엇을 많이 안다고 이뤄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해가 전파되어 우리가 머리로 알 수 없는 신을 머리로 알게 끔 프로그램화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원래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을 바탕으로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이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지나치게 부풀려졌습니다.
신을 인정하는 양심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14절과15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어서 그것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게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덕과 율법이 필요할까요? 이는 아마도 인간이 양심만으로 버티기에는 죄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덕과 율법이 없으면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이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율법 없이도 율법을 실천합니다. 양심으로 살기에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돕지 말라도 해도 돕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도 한국인들 중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심 또는 신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그 양심이 더욱 다져지고 강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치고 민초를 위해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버트란드 러셀도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사위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비를 지원했는데 이는 양심에 바탕을 둔 행동입니다. 이성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될 분이었습니다.
양심을 가리는 교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질을 받을까요? 첫째는 양심을 실천하며(롬 2:13)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생기는 부조화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가 나쁘지는 않지만 덩치가 커지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내가 알려질수록 피할 수 없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그런 것과 패키지로 따라온다.” 교회가 크건 작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으로 회복하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양심에 털났다
양심에 털났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털이 나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근본 양심은 이것을 압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압니다. 믿는 자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원래의 양심에 성령까시 합세하시니 괴롭습니다.이 때 우리는 두 가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남 탓하는 것입니다. 내 털난 양심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남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를 합니다. “아, 내가 이렇게 양심에 털이 나 있구나.”하고 말이죠.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로마서 2장4절).그 용서와 인자하심을 깨달으면 내 양심도 회복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자는 결코 “신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이 없이는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정신적인 문제로 해석하더군요.
신의 존재를 거부하더라도 죽음과 고통 앞에서는 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앙일보 LA의 2009년 4월12일자 스포츠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골프 선수 앤서니 김에 대한 기사입니다.
“앤서니 김은 경기 후 소감에서 "대회 첫 날 75타로 부진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9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LA 에인절스의 유망주 투수 아덴하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읽고 골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앤서니는 "기사 맨 마지막 문장에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22살이라고 해도 말이다. 때문에 매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야 된다'고 써 있었는 데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 평생 꿈이 매스터스에서 한 번 쳐보는 것이었다. 사실 인생에서 보기나 3퍼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여기 나와서 골프를 친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기쁨이라는 걸 잠시 잊었던 것 같다"며 "오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해서 버디 11개를 잡은 것 같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원문 기사 보기]
남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안에 있던 양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원래 그 안에 있던 양심은 스포츠를 통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에서 주는 메시지가 온통 성공, 승리, 돈이니 그의 양심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죽음과 육체적인 고통은 메가폰 역할을 합니다. 양심 메가폰. 양심 메가폰을 든 존재는 바로 신입니다. 신이 없으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 양심을 작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에 털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우리에게 다가올 게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신의 심판입니다 (2:5). 그럼에도 심판권이 있는 신은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려주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2:4). 기회는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털난 양심을 계속해서 제거합시다. 죽는 그날까지.
적용
개인적으로 양심에 꺼리끼는 일이 많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다 내놓고 양심 회복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심어주셨던 그 양심. 홀가분하지는 않다. 여전히 내 안의 양심이 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오늘 그 털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 종일 회개의 기도를 하고 싶다.
Think Deeper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바로 그런 깨끗함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주여, 깨끗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깨끗함과 정직함의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함의 능력이 아니라 깨끗함에 대한 갈망입니다. [김동호 목사, ‘깨끗한 크리스천’, P.23]
1997년 지미 카터는 그의 책 <사랑의 실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니버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안전을 위해 미국에 머물도록 설득했다. 본회퍼는 거절했다. 그는 독일에서 박해받는 나머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고...히틀러에 항거하여...공개적으로 나치와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본회퍼는 마침내 체포되었고 수감되었으며, 1945년 2월 4일, 연합군이 독일을 해방시키기 불과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