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ow street; Mdina, Malta
Narrow street; Mdina, Malta by foxypar4 저작자 표시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가 아직은 어린 아이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른이지만 성숙이 교회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성숙 단계로 들어간 교회라고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 믿음과 인내로 여러 교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고 있습니다 (살후 1:4).

성숙한 교회에서는 바울이 칭찬을 많이 하고 덕담을 자주 합니다. 물론 덕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가 성숙해질 있도록 권면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교회에 대한 권면과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말이 같지만 상황을 알고 읽으면 다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교회마다 상황과 사정이 다르고 바울의 책망과 권면도 다른데 역시 그가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에 대한 소개가 핵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낮아짐) 부활에 관한 내용부터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의 심판을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아야하겠기에 바울이 사랑장(고린도전서 13) 포함한 같고, 빌립보 교회는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메시지가 필요했던 같습니다. 이단 문제로 골치 아팠던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함에 대한 내용이 필요했고, 재림의 임박성을 너무 열렬히 기대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의 오심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성숙한 교회인가 성숙하지 않은 교회인가에 따라 편지 내용이 크게 다름을 있습니다. 성숙함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미성숙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를 읽는 시점에 그 교회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는 질서가 잡혀야 했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고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양념을 넣듯이 했습니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은혜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했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다른 부분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거론된 교회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교회들입니다.

로마서는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게 다뤄졌기에 편지의 비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위에 소개된 바울의 편지글은 개인차원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는 , 따라서 내용을 21세기의 기독교 리더가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며 공동체적인 해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상황에 맞는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인 같습니다.

설교자는 교회의 상황에 맞는 본문을 골라 설교를 해야하고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듣는 아니라 공동체적인 해석을 하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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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분을 섬기는 사람은 은혜, 자유, 질서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공동으로 알려고 하고 그의 성품 닮기를 공동으로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21세기 교회는 그러한 모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1세기의 고린도교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회는 21세기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나옵니다. 12장부터 14장까지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영적 은사와 사랑을 생각하지만 사도 바울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와 사랑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 자유, 질서 안에서 행해질 때 개인과 공동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자유, 질서의 하나님인데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성품을 완벽하게 이 땅에서 표현해낸 유일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은혜요 그 자체로 죄에서의 자유요 그 자체로 질서입니다. 그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질서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은혜, 자유, 질서를 생각하며 고린도전서 12장의 영적 은사를 읽으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이 잘나서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 그리고 공동체의 유익(질서)을 위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은사를 개인적으로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 것처럼 영적인 은사도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그런 개념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미국인은 조금 어렵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강하기 때문에 영적 은사가 개인적으로 받는 은사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인이 잘 이해하는 부분은 몸의 지체 중에 약한 것을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후반부). 한국인은 그것에서는 약합니다. 나영이에게 평생 쓸 배변 주머니를 제공한 곳은 미국 업체의 한국 지사였습니다. 그렇게 이슈화 되어도 정작 나영이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데 인색한 한국 사회입니다. 약한 자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1224절 말씀을 미국 사회는 비교적 잘 이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 비해서는 약간 낫다는 말입니다.

핵심은 공동체 안에서 약한 지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영적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서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떄문입니다.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한 개인이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 사랑에 감전되어 조금이나마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등의 내용은 사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앞에 예수님이라고 말을 붙이면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래참고, 예수님의 사랑은 온유하며, 예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등으로 하면 말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전체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되시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것은 곧 사랑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장에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에 대해 나오는데 이 모든 것도 예수를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운 공동체 안에서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나옵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세우는 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게 낫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에 의해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가 병고친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들고,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면 자기 교회는 무시하고 그 집회로 몰려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라고 했는데, 기적의 은사에 집중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되려고 했던 교회입니다(11:18). 고린도 교회는 과거 우상숭배자들로 가득했던 교회입니다(12:2). 고린도교회는 어떤 은사가 최고인지 논란이 있었던 교회입니다(12:1-3). 그야말로 혼란의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대혼란의 상황입니다. 뭐가 진리인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교회의 기본은 머리인 예수를 섬기는 것, 그의 대속을 믿는 것, 그의 부활을 믿는 것, 그리고 그의 은혜, 자유, 질서의 메시지를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족, 교회, 커뮤니티, , 국가, 지구촌이 모두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를 예수의 은혜, 자유, 질서의 메시지를 품고 운영하고, 공동체에 참여할 때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14:33).

이런 관점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보면 그는 은혜, 자유, 질서에 대한 메시지를 비교적 균형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교적 인내심이 있고, 비교적 친절한 편이며, 비교적 자랑을 하지 않는 편이며, 비교적 무례하지 않고, 비교적 불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는 시민들의 자유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엉뚱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질서 안에서의 자유를 선언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란 아무렇게나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어떤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자유입니다. 미국이 그동안 외쳤던 자유는 방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바마를 하나님이 세우신 미국 대통령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1세기 고린도 교회와 같았던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사도 바울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오바마가 구세주와 같다고 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오바마는 적어도 정치계에서는 사도 바울과 비슷하다고 하는게 더 나은 표현 같습니다. 비슷하다는 것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치계에서는 그런 느낌을 준다는 말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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