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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cause1 by musical photo 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여성이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심지어 여성들조차도 여성 담임 목사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예로 듭니다. 구약 성경에 제사장은 모두 남성이었고 신약 성경에 사도 바울이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예로 듭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안수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인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편견을 서포트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잘 못 차용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에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전에는 종(slave)을 허용했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하며, 전에는 여자가 부족한 것처럼 느꼈는데 하나님은 남녀를 구별해서 사랑하지 않으시며 그는 모든 이를 동등하게 사랑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안에는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날까요. 이는 오랫동안 내려온 문화적인 유산, 정신적인 유산 때문입니다. 백인이 흑인 노예 제도를 사용했을 때도 함의 자손들인 흑인이 노예가 됨의 정당함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성경의 차용이 오랫동안 묵인되었고 당연시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남성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남성우월주의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구약에는 차별적인 언행이 자주 기록됩니다. 사사기는 바로 대표적인 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여성에게 맞아 죽기 전에 여성이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사사기(Judges) 9장에 나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적인 발언인 것이죠.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이 여성에게도 힘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사사와 장군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고 형제 70명을 죽이고 바알 신을 섬기도록 내버려둔 아비멜렉을 쳐서 죽인 자도 여성이었습니다.



옳은 일은 아니지만 사사기에 삼손을 유혹한 여성 들릴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분명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가 존재했으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파워를 행사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파워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을 고루 사용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편견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남자가 아니었던가.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죄를 짓도록 유혹한 존재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분명 남성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중성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 문화가 남성중심적인 사회였기에 선교사 활동을 위해 남성이 적당하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이 우월해서 예수님이 남성으로 오신 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 사회였기에 남성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유대 사회가 여성우월주의사회였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여성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아담도 같은 죄를 지었기에 누가 유혹했고 누가 유혹을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을 한 자나 유혹을 당한 자 모두 하나님을 등진 자이기에 죄인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섞자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일이고 여성이 아기씨를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아도 됨은 그러한 근본적인 역할 분담과는 사실 연관이 덜 있습니다. 지금은 여성이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여성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고 여성 목회자의 안수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목회자 안수는 따라서 창조의 원리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원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입니다.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대에서 방황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 남성 목회자는 그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성 목회자는 태부족합니다. 그들은 돌봐줄 목회자가 없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금 목회적인 상황이 여성 목회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성 목회자에 안수하실 것입니다. 그 안수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대중문화에서 여성을 폄하하고 여성은 하등 인간인 것처럼 비춰질 때가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다름과 틀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다르고, 아시안과 히스패닉이 다른 것처럼 여성과 남성은 다른 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리다고 말하자면 사실 남자도 틀리고 여자도 틀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르면서도 틀린 존재들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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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10/01/15 16:2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문화가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않되는데...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질서를 강조했다고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이야기했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자유가 강조됩니다. 4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바로 질서, 은혜, 자유입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분열과 이방신 숭배, 이단 출몰로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질서를 먼저 잡으려고 했던 바울은 주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교회입니다. 신앙 성숙을 위해 계속 은혜를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 바울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장황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활동한 내용을 설명한 바울은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에 묶여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이들은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실 율법은 초등학문이 맞습니다. 성령은 고등학문이고 율법은 초등학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가 숨이 막혀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점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에 필요한 메시지가 갈라디아서 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갈라디아서 325).

하나님의 질서는 기초가 되고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가 서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기초는 잡혀 있다고 있습니다. 위에 자유를 세워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너무 율법주의적인 교회가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해석해서 강해로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은 율법을 무시하자는 아니라 율법의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야 세상과도 올바른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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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Name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있을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저작자 표시비영리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같습니다. 118절에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땅에서는 낮아질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것을 꼭꼭 집어주는 조금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공감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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