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orth Korean soldier holding a pair of binoculars looks south on the north side of the truce village of Panmunjom in the demilitarised zone separating the two Koreas in Paju, about 55 km (34 miles) north of Seoul, August 11, 2010. South Korea vowed to respond firmly to more provocations by Pyongyang after the North fired a barrage of artillery rounds near their tense maritime border, but analysts played down the prospect of combat. REUTERS/Jo Yong-Hak (SOUTH KOREA - Tags: MILITARY POLITICS)

한반도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국제사회의 상황도 좋지 않다. 곳곳에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고 각종 자연재해로 전 세계가 혼동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쁘기는 한데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고 있다. 뭔가 큰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 그저 살던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소선지서의 첫 예언서인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지금의 한반도 상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평범한 목동이었던 아모스는 북왕국(이스라엘)의 부강함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북왕국은 여로보암2세 시절이었는데 경제적으로 풍성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많았던 겉보기에는 괜찮은 나라였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화려한 예배와 복에만 집중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이방신을 섬기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들의 경제적 풍요함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북왕국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하나님은 예언자 교단(길드)에 속하지 않은 평범한 아모스를 통해 "너희가 벌이는 절기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모스 521-22).

왜 그런가. 북왕국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집중해 하나님을 마치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모시는 듯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가. 기복신앙으로 가득차 있다. 교회 건물은 점점 화려해지고 예배도 초현대식으로 엄청난 시설 안에서 드려지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간절함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교회로 인해 사회에 공의와 정의가 침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엄청나게 많은 문제가 한국 교회에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를 정화할 능력이 한국 교회에는 없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 목사도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이 없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회의 권세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부정직과 사기가 너무나 팽배해 있다. 이는 아모스 시대의 북왕국과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은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무너지도록 하셨다. 앗시리아는 혐오스러운 짓을 일삼는 나라였다. 앗시리아는 오늘날의 북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앗시리아도 조만간 망했지만 일단은 정신을 못 차리는 북왕국을 손을 보고 망했다.

여러 정황을 보고 성경의 역사를 본다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려는 현재의 시도는 당연한 듯해 보인다. 천안함 사건이 이미 터졌지만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또 터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반도에 더 큰 분쟁(나아가서는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측발의 상황인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전기, 전자 시스템을 일순간에 정지시키는 '전자장치를 무력화하는 전자기(EMP: Electro Magnetic Pulse)'을 개발해 전면전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다. <관련 기사: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68026 >

해결점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아모스 54)." 회개하는 것이다. 한국은 사회 및 교회 자정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전자장치를 무력화하는 전자기탄'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 찾고 그의 구하심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을 찾고 회개가 이뤄지면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뜨거운 예배가 교회에서 다시 일어난다. 사회의 정의가 회복된다. 뜨거운 예배와 사회의 정의는 우리의 노력이 아닌, 회개로부터 시작한다. 회개로 인한 예배 회복과 사회 정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한국은 점점 위험한 위치로 갈 수도 있다. 누구 탓 할 것도 없다. 지금 나부터 회개하고 나부터 주님을 찾는 기도를 해야 한다. 때가 급하기 때문이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4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약점 많은 자여! 그 분을 보라[LA중앙일보]
박병기/Jesusinculture.com 운영자
기사입력: 04.27.10 15:46
요즘 이상하게 'vulnerability'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른다. 이는 사전적으로 보면 '상처받기 쉬움' '약점이 노출됨'이라는 의미의 단어다. 약점이 노출되기 시작하면 비난이 따른다.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다. "넌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누가 자격이 있을까? 그 어느 누가 목사 신부 승려 정치인 기자 교사 변호사 의사가 될 자격이 있는가? 물론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가 있지만 과연 이들은 그 일을 할 '진정한 자격'이 있을까? 이 세상에 자격이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다만 그 일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그 일을 열심히 해나가야 할 숙명에 놓여졌을 뿐이다. 그들의 마음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정말로 자격있는 자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나 다행히 보통 사람에게는 투심력이 없다.

간음한 여자가 바리새인들에 의해 붙잡혀 왔을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지라"고 했다. 돌을 던지는 자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일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던 것일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은 수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최근 죄지은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 냉정하고 냉혹한 사회다. 죄인들끼리 서로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렇기에 우리는 '약점이 노출됨'을 싫어한다. 약점이 노출되는 순간 쉽게 상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약점이 많을 수록 '커버업'은 더욱 철저해진다.아니면 역반응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폭로전에 나선다.

기독교인이 읽는 성경은 '약점이 노출됨'을 권고하는 책처럼 보인다. 수많은 범죄와 그에 대한 징벌과 용서가 가감없이 노출된 책이 성경이다. 어떤 이는 이런 책을 어떻게 '성스러운 경전(성경)'이라고 할 수 있냐고 무시한다. 이런 부분은 삭제하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어김 없이 포함시켰다.

다윗이 자신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뺏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베드로가 의리없이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한 내용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가 십자가 처형 대신에 멋지게 세상의 왕으로 군림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성경은 '약점이 노출됨'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인 것이다. 왜 그럴까? 약함에 강함이 있기 때문이다. 빈 자리에 물이 차는 것처럼 약점이 많고 약함이 머무는 곳에 강한 물결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강한 곳에 강함이 들어갈 수 없다. 요즘 많은 이가 다양한 이유로 약함에 빠져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의 약점이 노출되고 있다. 상처 받을 일이 더 늘어났다. 무시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놀라운 위로가 저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 약점과 단점이 노출된 이들이여 강하신 그분을 바라보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9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생활 속에서] 분별력을 찾아야 할때[LA중앙일보]
박병기/Jesusinculture.com 운영자
기사입력: 05.11.10 15:07
최근에 어떤 기도 모임에 참여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기도모임에서 중보기도자들은 인간의 몸에 '마이크로칩(micro-chip)'이 심어지는 것을 우려하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마이크로칩은 오바마 정부가 '의료개혁안'에 포함한 내용이며 오바마는 적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독교계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나는 그래서 그런 말을 전달하는 분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 근거는 어디에 있냐고 질문했다. 그는 "의료개혁안 O페이지에 있다"고 답했다. 개혁안 내용은 인터넷에 올려져 있기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해당 페이지를 가보았더니 CHIP이라는 단어는 분명 있었다.

이는 '마이크로칩'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Children's Health Insurance Program'의 약자였다. 그리고 개혁안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이크칩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오바마 정부를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온 내용을 억지로 껴맞춘 루머가 기독교 내에서는 기정사실처럼 되어 가고 있다. 이는 노인들에 대한 혜택을 축소한다는 '죽음의 위원회' 소문과 유사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적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을 적 그리스도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친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오바마와 그의 아내는 분명 자신들은 크리스천이며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다고 고백하는데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오바마를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앞잡이'인 것처럼 여기며 지나칠 정도로 미워하고 있으니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료개혁안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휩쓸리는데도 이를 제대로 보고 잡아주는 통찰력 있는 교계 지도자가 거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강력한 명령인데 이 내용을 배울 때 우리는 연장자들을 존중하고 정부의 관리에 순종하고 선생님을 존경하고 종교 지도자를 순전하게 따르고 피고용인은 고용주에 최선을 다할 것을 배운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라는 전제가 항상 붙는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직장상사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것은 5계명을 지키는 것의 연장이다. 정부 관리에 순종함은 법 준수를 잘하고 세금을 속이지 않고 정부의 정책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관리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권위를 가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권위에 적절히 반응할줄 알아야 하고 권위를 남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독교 내 일부 선지자 또는 예언자들은 '마지막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분별력을 잃어 점점 균형을 못 잡게 되고 이를 이단이 더욱 교활하게 이용하고 종교계는 더욱 어수선해진다. 분별력 회복을 위해 교계의 영성 회복이 시급한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9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불편해지는 게 더 많다”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만사형통을 지향하며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대형교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 대해 ‘세상적인 세력은 가지고 있을 지 모르지만 기독교로서 가져야 할 영성은 찾기 어렵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특히 “진보적 기독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기총은 그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의 복을 비는 이기적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등식을 인정할 수 없다. 자기 개인이나 개교회, 개교단을 위해 기독교와 사회와 세상을 도외시한 채 사회의식을 마비시키는 종교는 오히려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관련기사: http://well.hani.co.kr/board/view.html?uid=279797&cline=1&board_id=jh_san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7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0/03/08 15:1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예수님이 기준이라면, 세상적으로 불편해 보일수 있는 것들이
    결코 불편한 것이 아닌 것일테지요 :-)
    덕분에 좋은 글 보고 갑니다~
    • 2010/03/08 15:27
      댓글 주소 수정/삭제
      좋은 깨달음을 주시는 댓글입니다. 저에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박병기/Jesusinculture.com 운영자

최근 크리스천 센추리라는 기독교 잡지에 듀크대 신학대의 학장인 L. 그레고리 존스라는 분이 '믿음이 중요하다(Faith matters)'라는 제목으로 기고해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목회자는 정부 라이센스가 필요 없지만 안수를 받으려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수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기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얼마 동안은 목회학 석사가 표준이 되었다. 최근 들어 그러한 기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요즘은 그러한 학력 학위보다는 목회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를 더 보는 것 같다. "

실제 미국 개신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가 없지만 훌륭히 목회를 수행하는 목회자들이 눈에 띈다. 시카고에 있는 세계적인 교회인 윌로우 크릭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는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학사(BA) 학위만을 받은 목회자다.

세계적인 기독교 작가이자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해외 선교사로 나가려면 필수로 밟아야 하는 석사과정 2년만을 마친 후 다른 신적 부르심이 있어 전통 목회를 하게 됐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의해 미국 최고의 목사.설교가로 선정된 루케이도 목사의 성경해석과 세상과의 접목은 탁월하다.

미국 내에서 10대 대형 교회 중 하나인 하베스트 크리스천 펠로우쉽의 그렉 로리 담임 목사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정식 교육 학위의 전부다. 그는 19세에 성경 공부를 인도한 후 30명 전원의 삶이 변하는 체험을 한 후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수십 년 후에 남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가 됐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조엘 오스틴 목사(레이크우드 교회)는 오럴 로버츠 대학에서 단 한 학기 강의를 들은 것이 그의 종교 교육의 전부다. 그는 한 학기를 마친 후 학교를 떠나 부친이 사역하던 레이크우드 교회 TV 제작실에서 1982년부터 1999년까지 일을 했고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교인들의 뜻에 따라 담임목사직을 승계했다.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의 리더이자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 내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인에 들어갔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신학교 학력이 전무하다.

이 글은 목회학 석사가 쓸 데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학위는 앞으로도 목회자에 권위를 실어줄 것이다. 듀크대의 존스 학장도 "목회학 석사는 앞으로 적어도 25년은 유효할 것"이라고 했다. 존스 학장은 그럼에도 "목회학 석사는 MBA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해지고 있다. MBA는 많은 사람을 잘 훈련시켰다. 회사에서 MBA 공부를 한 사람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요즘 MBA는 필수 학위가 아니다. 목회학 석사는 MBA와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요즘 교회 구성원들은 목회자의 좋은 학력을 원하는 게 아니라 영성이 뿌리가 되어 있는 효과적인 리더십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6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good cause1
good cause1 by musical photo 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여성이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심지어 여성들조차도 여성 담임 목사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예로 듭니다. 구약 성경에 제사장은 모두 남성이었고 신약 성경에 사도 바울이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예로 듭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안수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인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편견을 서포트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잘 못 차용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에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전에는 종(slave)을 허용했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하며, 전에는 여자가 부족한 것처럼 느꼈는데 하나님은 남녀를 구별해서 사랑하지 않으시며 그는 모든 이를 동등하게 사랑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안에는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날까요. 이는 오랫동안 내려온 문화적인 유산, 정신적인 유산 때문입니다. 백인이 흑인 노예 제도를 사용했을 때도 함의 자손들인 흑인이 노예가 됨의 정당함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성경의 차용이 오랫동안 묵인되었고 당연시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남성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남성우월주의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구약에는 차별적인 언행이 자주 기록됩니다. 사사기는 바로 대표적인 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여성에게 맞아 죽기 전에 여성이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사사기(Judges) 9장에 나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적인 발언인 것이죠.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이 여성에게도 힘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사사와 장군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고 형제 70명을 죽이고 바알 신을 섬기도록 내버려둔 아비멜렉을 쳐서 죽인 자도 여성이었습니다.



옳은 일은 아니지만 사사기에 삼손을 유혹한 여성 들릴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분명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가 존재했으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파워를 행사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파워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을 고루 사용하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편견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남자가 아니었던가.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죄를 짓도록 유혹한 존재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분명 남성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중성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 문화가 남성중심적인 사회였기에 선교사 활동을 위해 남성이 적당하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이 우월해서 예수님이 남성으로 오신 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 사회였기에 남성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유대 사회가 여성우월주의사회였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여성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아담도 같은 죄를 지었기에 누가 유혹했고 누가 유혹을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을 한 자나 유혹을 당한 자 모두 하나님을 등진 자이기에 죄인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섞자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일이고 여성이 아기씨를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아도 됨은 그러한 근본적인 역할 분담과는 사실 연관이 덜 있습니다. 지금은 여성이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여성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고 여성 목회자의 안수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목회자 안수는 따라서 창조의 원리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원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입니다.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대에서 방황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 남성 목회자는 그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성 목회자는 태부족합니다. 그들은 돌봐줄 목회자가 없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금 목회적인 상황이 여성 목회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성 목회자에 안수하실 것입니다. 그 안수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대중문화에서 여성을 폄하하고 여성은 하등 인간인 것처럼 비춰질 때가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다름과 틀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다르고, 아시안과 히스패닉이 다른 것처럼 여성과 남성은 다른 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리다고 말하자면 사실 남자도 틀리고 여자도 틀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르면서도 틀린 존재들입니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5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히노끼
    2010/01/15 16:2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문화가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않되는데...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2009년 12월23일자 미주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4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0/01/10 02:5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2. 2010/01/10 15:4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The Love of God
The Love of God by JustinLowery.com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나요? 이런 질문을 우리는 자주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은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19:23-24. 표준 새번역)

  이때 예수님은 지혜로운 답변을 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6절. 현대어 성경)

 다시 한 번 질문을 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 가나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흡족한 부자가 되려면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자들은 가난한 분들을 업신여기거나 그들을 이용해 부를 더욱 쌓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에서 6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Listen, my beloved brethren: Has God not chosen the poor of this world to be  rich in faith and heirs of the kingdom which He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But you have dishonored the poor man. Do not the rich oppress you and drag you into the courts?“ (표준 새번역/NKJV)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부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야고보서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 관심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만큼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부자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방법은 역시 헌금을 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헌금 생활은 그래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자의 십일조와 가난한 자의 십일조를 생각해 볼 때 부자는 십일조를 해도 남는 것이 많지만 가난한 자는 십일조를 하면 남는 것이 적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1억 원을 벌었을 때 1천만 원을 십일조로 헌금하면 9천만원이 남지만 가난한 사람이 1백만 원에서 10만 원을 헌금하면 90만원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복음'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인 로널드 사이더 목사는 '누진 헌금'를 강조합니다. 최저 생계비에 대해서는 기존의 십일조를 내고 그 이상의 수입에 대해서는 십의 이조, 십의 삼조를 내야 정당한 것임을 그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크리스천의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얼마나 복종하고 있는 지를 보십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법을 적극 권합니다. 최저 생계비에 대한 십일조는 교회에 헌금하고 나머지 누진 십일조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기관에 헌금하면 이 사회에 정의가 조금은 회복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저 생계비는 사이더의 경우 '기초 생활비'로 명명하는데 기초 생활비는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최저 생계비+자녀 학교 교육을 위한 기본 비용(과외 비용 제외)+세금+약간의 비상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돕는데에 많은 지원을 한다면 교회에 헌금에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라면 어려운 분들을 돕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내가 다니는 교회는 가난한 자를 위해 얼마나 교회의 예산을 쓰고 있나.

2. 내가 '누진 십일조'를 기부하려는 비영리 단체는 어려운 분들을 돕는 것에 비해 자체 운영비로 얼마나 쓰고 있고 고위 관리들의 월급은 어느 정도 나가는 지, 재정 관리가 투명한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3. 헌금은 하나님의 마음이 가는 곳에 써야 합니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4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Happy
Happy by novelgaze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예일대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은 한 신학생이 졸업장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한국 교계에서 어려운 점 하나는 목회학
(M.Div.)을 하지 않으면 목회자로서 인정을 해주지 않는 점이다. 목회학 석사를 하지 않은 교회 리더는 헌신이 부족하거나 뭔가 모자르다고 생각을 한다. 정규 신학교가 아닌 신학교나 교회에서 개설한 신학교 출신, 알려지지 않은 신학교 출신은 함량미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내 유명 정규 신학교의 목회학은 이수 과목이 더 많고 학위를 마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명 신학교의 목회학 석사 과정 이수자들의 수고는 귀하고 귀하지만 교회 리더를 영입할 때 목회학 석사 과정 이수자만이 기본이 된다는 점은 참으로 아쉽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쉬운 이유는 다음과 같은 현실 때문이다.

현재 교회는 점점 목회지가 아니라 선교지가 되어가고 있다. 교인들은 목양의 대상이기보다는 선교의 대상이 되는 성향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리더십의 다양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사람의 상황이 다 다르기에 어떤 이는 목회학 석사 과정을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선교학을, 어떤 이는 심리학을, 또 어떤 이는 정규 신학교에 다니지 못할 수도 있다. 여러 사람 중 교회 리더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는 목회학 석사 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자들도 있기에 목회학 석사로 교회 리더를 규정짓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Bill Hybels delivering his stories
Bill Hybels delivering his stories by James Kirsop 저작자 표시비영리
빌 하이벨스 목사

한국 교회는
목회학 석사에 대한 입장이 철옹성이지만 미국 교회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 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는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학사(BA) 학위를 받은 목회자다.  그는 석사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 한국적인 분위기에서는 목회자가 될 수 없는 학력이다. 이 세계적인 대형 교회를 개척한 하이벨스 목사가 헌신이 부족해 석사 과정을 밟지 않았을까. 그런데 많은 한국 교계 지도자들은(이민 교회 포함) 목회학 석사 과정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헌신이 부족하다고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Max Lucado entertains a group of Ethiopian children
Max Lucado entertains a group of Ethiopian children by Michael S. Hyatt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맥스 루케이도 목사가 에티오피아에서 아이들을 위해 '즐겁게' 설교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독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해외 선교사로 나가려면 필수로 밟아야 하는 석사과정 2년을 마쳤다. 원래 해외 선교를 나가려고 했기에 그는 목회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루케이도 목사는 해외 선교를 포기하고 국내에서 교회 개척을 했다. 1988년 그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시에 있는 오크 힐스 교회의 사역자로 들어가 오랫동안 훌륭하게 사역을 수행했고 넌 소중하단다(You are special)’ 등의 베스트 셀러를 남겼다. 루케이도 목사에게 목회학을 하지 않았으니 헌신이 부족하다고 말할 강심장은 과연 누구인가.

Opry Mills
Opry Mills by cliff1066™ 저작자 표시
책 사인회에서 조엘 오스틴 목사

긍정의 힘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조엘 오스틴 목사(레이크우드 교회)는 어떤가.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써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오스틴 목사는 오럴 로버츠 대학에서 단 한 학기 강의를 들은 것이 그의 종교 교육의 전부다. 그는 한 학기를 마친 후 학교를 떠나 부친이 사역하던 레이크우드 교회 TV 제작실에서 1982년부터 1999년까지 사역을 했고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소천하자 곧바로 담임목사직을 승계했다.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목회자
50인 중 한 명인 잭 그레이엄은 학사 과정에 있으면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목사로서 목회를 하던 중에 틈틈이 공부를 해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내에서
10대 대형 교회 중 하나인 하베스트 크리스천 펠로우쉽의 그렉 로리 담임 목사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정식 교육의 전부다. 그는 19세에 부름을 받아 30명의 성경 공부에 참여했던 멤버들의 인생이 변하는 체험을 한 후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남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가 됐다. 그렉 로리 목사는 50대의 중년 목회자이지만 10대 청소년 크리스천이 좋아하는 설교가 중 한 명이다.



이머징 처치의 리더인 브라이언 맥클라렌 역시 신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없고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현직 목사다.

다음은 미국 내에서 권위 있는 기독교 잡지인 크리스천 센추리 2009 1215일자 칼럼이다. 목회학 석사에 관한 내용이라 눈에 띄어 번역을 했다.

The Christian Century Magazine (크리스천 센추리 매거진)
출처:
http://www.christiancentury.org/article.lasso?id=805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음이 중요하다(Faith matters)

2009년 12월15일, December 15, 2009

목회자와 학위(Pastors by degree)
by L. 그레고리 존스(L. Gregory Jones)
 
목회자에게 필요한 정부 라이센스 같은 것은 없다. 약사나 변호사는 정부에서 규정하는 라이센스가 필요하다. 마사지 치료사도 정부 라이센스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규정하는 라이센스 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으려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수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기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오랫동안 그러한 기대는 목회학 석사(Master of Divinity)가 표준이 되었다. 최근 들어 그러한 기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요즘 교인들은 그러한 학력/학위보다는 목회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를 더 보는 것 같다.

지난 20여 년 동안 목회학 석사는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안수를 받기 위한 필수적인 학위였다. 정부의 규정이 없었음에도 이는 목회의 현장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는 효과적이었다. 교회는 누가 안수를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회학 석사 없이도 안수를 받도록 허용하는 교단들이 생겨났고 이것이 점점 미국 교회에서 패턴이 됐다. 연합감리교단(UMC)은 이 방식을 허용한 대표적인 교단이다. 장로교단도 ‘Lay pastors’라는 명칭으로 목회학 석사를 받지 않는 이에게 목사 안수를 해줬다. (역자주: 침례교단도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서는 작은 교회들이 목회학 석사 학위 소지자가 아닌 목회자들을 선호하게 됐다. 독립 교단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리더를 양성하고 있다. 미네소타에 있는 베들레헴 침례 교회는 아예 교회 내에 신학교를 세워 리더를 양육하고 있다. (역자주: 척 스미스 목사의 갈보리 교회도 비슷하다) 

즉, 목회학 석사가 없이도 목회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했는데 현재 추세는 이들이 목회학 석사를 공부한 목회자들이 차지했던 자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즘은 대형교회 목회자도 정식 신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대표적인 목회자다. (역자주: 이머징 처치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맥클라렌 목사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게 공식 학교에서 공부한 게 전부다.)  교회 리더들은 점점 신학교 학력보다 효과적인 리더를 찾는 추세로 가고 있다.

물론 목회학 석사는 쓸데 없지 않다. 이 학위는 앞으로도 목회자에 권위를 실어줄 것이다. 이는 MBA와 비슷하다. MBA는 많은 사람을 잘 훈련시켰다. 회사에서 MBA 공부를 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요즘 MBA는 필수 학위는 아니다. 목회학 석사는 MBA와 비슷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미래의 목회자 교육, 리더십 교육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성직자의 교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우리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기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 리더십은 어때야 하는가? 어떤 이는 안수를 받을 수 없도록 하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인생 전반에 걸쳐 어떻게 교육이 진행되어야 하는가? 교회 내에서 직책이 다르면 다른 교육을 맡아야 하는 것인가? 전문 사역자와 평신도 사역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어떤 학위를 받은 자가 교회를 잘 섬길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목회학 석사가 앞으로 적어도 25년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역자에 대한 구분은 계속 변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삶과 사역을 위한 교육의 개념은 과연 어떻게 바뀔 것인가?

 L. Gregory Jones is dean of Duke University Divinity School in Durham, North Carolina.

글: 그레고리 존스, 듀크신학대학교 학장
번역: 밝은터 (Jesusinculture.com 운영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3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맨발의 노인

2010/01/06 13:54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맨발천사 최춘선 (팔복 1)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우현 (규장, 2004년)
상세보기
 
맨발의 노인(1/3)
 
 "볼수록 아름다운 미스 코리아 유관순"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아줌마들을 향해 노인은 외쳤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아름다운 미스코리아가 유관순이라니..."볼수록 아름다운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그 말을 들은 남자들은 인상을 찌푸리거나 웃어대기만 하였다. 아무도 노인을 정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통일이 오기 전에는 절대 (신발을) 안 신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중에서-


 90년대에 서울 지하철에는 30년 동안 맨발로 다니며 사랑을 나누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하철 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노망이 들었거나 미친 노인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그는 맨발로 다녔고 온 몸에는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운 글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동경 유학을 했고 5개국어에 능통했다는 사실은 지하철에서 그를 손가락질했던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습니다. '맨발 천사' 최춘선 노인은 유관순, 안중근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있었는데 왜 우리 조국은 분단됐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Why Two Korea?"
 
 
맨발의 노인(2/3)

 "독립 유공자였기 때문에 오남매가 그렇게 고생하며 클 이유가 없었습니다.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대학까지 무료로 다닐 수 있는데 그걸 안 하시더군요."(최춘선 할아버지 아들의 증언) "왜 그러신거죠?" "완전한 독립, 통일이 안 되었다는 겁니다. 남과 북이 이렇게 분단되었으니 아직 진정한 해방은 아니다. 그리고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 운동을 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중에서-

90년대 서울 지하철에서 30년 동안 맨발로 다니며 사랑을 나눈 최춘선 할아버지. 그는 김포 공항에서 인천 국도까지 큰 땅을 소유한 대지주의 아들이었습니다. 동경 유학도 했고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 운동도 했던 인물입니다.

자신이 원했다면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0년간 자신이 소유한 땅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내주고 나머지 재산도 모두 고아들을 위해 썼습니다. 5남매 자녀(모두 교육자)들까지 아버지를 오해했고 약간은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맨발로 30년을 그렇게 다녔으니 말이죠. 30년간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합니다."
 
 

맨발의 노인(3/3)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없고, 보기 싫은 사람이 없고,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러운 것, 부러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법률 없이 일등 부자예요. 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일등 권세예요. 세상 왕들 (보다) 억만배 (많은) 권세예요."  어떤 삶이 진정한 해방이냐고 묻자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중에서-

최춘선 할아버지. 그는 30년을 지하철에서 보내며 온갖 조롱과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이 그들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맨발로 30년을 다녔지만 그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친 노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02년. 그는 지하철 객차 의자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당신은 미친 노인, 광신도가 아닌 진정한 천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영상으로 최춘선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분들은 http://www.godpeople.com/?GO=palbok_2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36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우리는 중고등부 부흥을 열망하고 갈망했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유홍설 (나침반, 2006년)
상세보기

 
세상은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용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정말로 중간에 있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좌(左)' 아니면 '우(右)'여야하고 보수주의 아니면 자유주의여야 한다는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중도적인 입장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중도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따라서 대접을 받지 못 한다. 균형 잡힌 사람은 '회색'이라고 놀림을 당한다. 내 편이 없다보니 중간 입장에 있는 사람은 외롭다.

유홍설 목사는 '우리는 중,고등부 부흥을 열망하고 갈망했다(2006. 나침반)'에서 1.5세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통찰력 있게 설명했다. 1.5세는 1세도 아니고 2세도 아닌 중간에 있는 외국 이민자다.

재미난 사실은 한국적인 문화 배경에서 1.5세는 1세의 문화와 2세의 문화를 다 흡수할 수 있는 특별한 세대가 아닌 1세의 것도 모르고 2세의 것도 모르는 절름발이 세대로 여겨진다. 컵에 물이 절반이 차 있을 때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말하는 사람의 사고를 가진 것이다.

유 목사는 그동안 관념적으로만 평가했던 1.5세를 현실적이고 이론적으로 잘 다뤘다. 이 책의 41페이지에 그는 1세와 2세의 중간에 있는 세대를 적절하게 소개했는데 그에 따르면 2세는 0-5세에 이민 온 자, 1.7세는 6-10세에 이민한 자, 1.5세는 11-12세에 이민한 자, 1.2세는 13-14세에, 1세는 15세 이상의 나이에 이민한 자다. 그는 1.5세와 함께 삶을 나눴다.

그는 1.5세에 대해 "한국과 미국 양쪽 문화의 장점을 다 가진 이들로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 영향력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한국 특유의 정과 시련을 이기는 인내심, 끈기, 적응력, 빠른 추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개척 정신, 독립심, 진정한 노동 정신, 합리주의, 준법정신, 그리고 전문 실력도 가지고 있습니다."(p.41)라고 소개했다.

유 목사는 "컵에 물이 절반이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진 것이다.

이 책의 1장부터 3장은 청소년과 삶을 나누고 청소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이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실제 경험에서 얻는 것이 많아 도움이 된다.

25페이지에 나온 MTV의 십대 전략 방법에 대한 내용은 우리에게 깊이 생각할 무엇을 제공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MTV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업체입니다. 저는 MTV를 청소년 사역자나 중고등부 교사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지구촌 십대 중앙집권 업체'라 부릅니다. 그들이 전 세계 십대 문화를 주도해갈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십대들을 향한 철저한 관심에 있습니다. MTV는 임의적으로 각 도시에서 십대들을 발굴합니다. 그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사례를 하며 그들의 사생활을 6개월에서 1년 정도 집중 관찰합니다. 십대들의 방에 어떤 그림이 붙어 있는지 살핍니다. 십대들이 어떤 언어를 주고받는지 연구합니다. 십대들이 우는 상황, 기뻐하는 이유를 분석합니다. 함께 가조, 함게 일어나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십대의 세계에 푹 빠져듭니다."

실제 유 목사는 십대들(특히 1.5세)과 함께 먹고 자고 마시고 놀며 그들의 성향을 그대로 호흡했다. 그래서 그가 써 내려간 내용들은 충분히 이론적이면서 실제적이다.

4장부터 8장까지는 거의 무(無)에서 시작한 1.5세 중고등부 교회 사역에 대한 실제 매뉴얼을 소개했다. 수백 명의 중고등부 학생들이 참여하는 '교회'로 만든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감동으로 모든 것이 가능했음을 고백한다.

이는 문화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진 내용이지만 글로벌 시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어 10대들과 호흡하는 이들에게 꼭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미래를 위해 영적인 투자를 하는 교회가 아닌 당장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사역에 주로 몰두해 있는 오늘날의 교회가 도전을 받을 내용도 있어 각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나 부목사님들이 읽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34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이사야서 9장에 보면 갈릴리에서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오실 왕은 평화의 왕이요, 영원한 아버지요, 강한 하나님이요, 놀라운 멘토라는 내용이 9장에 소개됩니다.

너무나 명백한 예수 탄생의 예언 부분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이미 기원전 750년 쯤에 예언이 됐던 것입니다. 97절에 보면 앞으로 태어난 그분은 영원한 평화와 공의와 정의를 가져올 분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모스서도 보면 하나님은 불의하게 돈을 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화가 나 있으십니다. 가난한 자를 등쳐서 부를 챙기는 자들에 대한 화가 그들에게 미칠 것을 예언자 아모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아모스서 그리고 신명기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공의의 하나님이요, 가난한 자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요, 평화를 가져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유다 땅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땅은 공의와 정의가 없이 자유경제주의의 이념 아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깊어지고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서 521절에 나는 너희의 종교 잔치를 싫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은 채 드리는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521-24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너희들 노래소리, 제사 지내는 것, 헌금 다 필요 없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98 / 미국)
출연 톰 행크스, 톰 시즈모어, 에드워드 번즈, 맷 데이먼
상세보기

성경 원어에 보면 공의라는 말은 어려움에 빠진 이를 건져내는 일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됩니까. 그렇지만 구해내려는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어려움에 빠진 인류, 어둠 속에 있는 인류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은 비효율이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한 일입니다. 군림하며 모든 이를 회심케 한 게 아니라 희생하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이성주의 사회에서는 비효율은 바보짓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여기저기에 공의를 강조하시며 바보짓을 하길 원하십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어려움에 빠진 이를 건져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더 높이 오르려고 하고 더 많이 챙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의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면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그냥 지나친 자들이 효율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내것 챙길 것 다 챙기면서 공의를 이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나의 희생과 손해가 있어야 공의가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우주의 창조자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공의는 결국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손해를 보게 되고 손해보면서 어려움에 빠진 자를 건져내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자녀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 목숨을 생각하겠습니까. 사랑하기에 수영을 못해도 물속에 뛰어들게 됩니다.

장진영 / 국내배우
출생 1974년 6월 14일
신체
팬카페 장진영 공식 팬클럽 JROSE
상세보기

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 씨의 남편이 손해를 보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곧 죽게될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그는 장진영 씨의 가족과 만나 모든 재산이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사랑과 공의는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손해를 감수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22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미주 중앙일보 2009년 11월10일자에 실린 Jesusinculture의 칼럼입니다. PDF 파일로 올립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8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맥스 루케이도 (Max Lucado) / 목사
출생 1955년
신체
팬카페
상세보기

by Max Lucado (맥스 루케이도 글)

Does Jesus have anything to say about dealing with difficult relatives? Is there an example of Jesus bringing peace to a painful family? Yes, there is. (예수님은 곤란하게 하는 친척을 다루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예수님이 고통 받는 가족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예는 있을까? 물론 있습니다.)

His own. (바로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It may surprise you to know that Jesus had a difficult family. If your family doesn’t appreciate you, take heart, neither did Jesus’.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가족/친척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당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까? 예수님도 그런 취급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His family … went to get him because they thought he was out of his mind” (Mark 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마가복음 3:21)

Jesus’ siblings thought their brother was a lunatic. They weren’t proud—they were embarrassed!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랑해 하기는커녕 당황해했습니다.)

It’s worth noting that he didn’t try to control his family’s behavior, nor did he let their behavior control his. He didn’t demand that they agree with him. He didn’t sulk when they insulted him. He didn’t make it his mission to try to please them.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는 가족이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자신의 생각에 억지로 동의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조롱해도 게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미션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Each of us has a fantasy that our family will be like the Waltons, an expectation that our dearest friends will be our next of kin. Jesus didn’t have that expectation. Look how he defined his family: “My true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are those who do what God wants” (Mark 3:35). (우리는 우리 가족이 마치 월튼가네 사람들처럼 가장 귀한 친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방어를 하는지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5)")

When Jesus’ brothers didn’t share his convictions, he didn’t try to force them. He recognized that his spiritual family could provide what his physical family didn’t. If Jesus himself couldn’t force his family to share his convictions, what makes you think you can force yours? (예수님의 형제가 예수님의 신념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가족은 육적인 가족이 제공하지 못한 것을 제공할 것임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친척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그것을 강요하겠습니까?)

Having your family’s approval is desirable but not necessary for happiness and not always possible. Jesus did not let the difficult dynamic of his family overshadow his call from God. And because he didn’t, this chapter has a happy ending.
What happened to Jesus’ family? (가족의 인정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항상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항상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가족은 곤란한 상황이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념 위에 그림자 지우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끝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Mine with me a golden nugget hidden in a vein of the Book of Acts. “Then [the disciples] went back to Jerusalem from the Mount of Olives.… They all continued praying together with some women, including Mary the mother of Jesus, and Jesus’ brothers” (Acts 1:12, 14, emphasis added).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행전 1:12, 14)

What a change! The ones who mocked him now worship him. The ones who pitied him now pray for him. What if Jesus had disowned them? Or worse still, what if he’d suffocated his family with his demand for change? (변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를 조롱했던 이들이 그를 예배했습니다. 그를 측은히 여겼던 이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변화를 강제로 요구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He didn’t. He instead gave them space, time, and grace. And because he did, they changed. How much did they change? One brother became an apostle (Gal. 1:19) and others became missionaries (1 Cor. 9:5).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 그들이 생각할 공간, 시간, 은혜를 허락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변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변했나요? 동생은 사도가 됐으며 다른 형제는 선교사가 됐습니다. (고린도전서 9:5)

So don’t lose heart. God still changes families. (그는 포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변화시킵니다.)

From He Still Moves Stones

Copyright (Thomas Nelson, 1999) Max Lucado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7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09/11/26 05:4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2. 스만이
    2009/11/27 07:0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위로도 되고 격려도 되는 훌륭한 글과 번역입니다. 가족에게도 강요할 수 없죠..감사합니다.


샬롬이란 말에는 평화도 있지만 정의, 질서, 조화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샬롬 커뮤니티(샬롬 공동체)를 꿈꾸며라고 달아보았습니다. 이 글은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 8면에 지난 2009년 11월4일 실렸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좀 더 큰 크기로 기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7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Narrow street; Mdina, Malta
Narrow street; Mdina, Malta by foxypar4 저작자 표시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가 아직은 어린 아이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른이지만 성숙이 교회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성숙 단계로 들어간 교회라고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 믿음과 인내로 여러 교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고 있습니다 (살후 1:4).

성숙한 교회에서는 바울이 칭찬을 많이 하고 덕담을 자주 합니다. 물론 덕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가 성숙해질 있도록 권면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교회에 대한 권면과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말이 같지만 상황을 알고 읽으면 다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교회마다 상황과 사정이 다르고 바울의 책망과 권면도 다른데 역시 그가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에 대한 소개가 핵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낮아짐) 부활에 관한 내용부터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의 심판을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아야하겠기에 바울이 사랑장(고린도전서 13) 포함한 같고, 빌립보 교회는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메시지가 필요했던 같습니다. 이단 문제로 골치 아팠던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함에 대한 내용이 필요했고, 재림의 임박성을 너무 열렬히 기대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의 오심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성숙한 교회인가 성숙하지 않은 교회인가에 따라 편지 내용이 크게 다름을 있습니다. 성숙함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미성숙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를 읽는 시점에 그 교회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는 질서가 잡혀야 했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고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양념을 넣듯이 했습니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은혜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했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다른 부분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거론된 교회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교회들입니다.

로마서는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게 다뤄졌기에 편지의 비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위에 소개된 바울의 편지글은 개인차원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는 , 따라서 내용을 21세기의 기독교 리더가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며 공동체적인 해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상황에 맞는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인 같습니다.

설교자는 교회의 상황에 맞는 본문을 골라 설교를 해야하고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듣는 아니라 공동체적인 해석을 하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6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질서를 강조했다고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이야기했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자유가 강조됩니다. 4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바로 질서, 은혜, 자유입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분열과 이방신 숭배, 이단 출몰로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질서를 먼저 잡으려고 했던 바울은 주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교회입니다. 신앙 성숙을 위해 계속 은혜를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 바울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장황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활동한 내용을 설명한 바울은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에 묶여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이들은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실 율법은 초등학문이 맞습니다. 성령은 고등학문이고 율법은 초등학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가 숨이 막혀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점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에 필요한 메시지가 갈라디아서 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갈라디아서 325).

하나님의 질서는 기초가 되고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가 서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기초는 잡혀 있다고 있습니다. 위에 자유를 세워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너무 율법주의적인 교회가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해석해서 강해로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은 율법을 무시하자는 아니라 율법의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야 세상과도 올바른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6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천안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단군왕검상
천안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단군왕검상 by ForestMind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최근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표현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 사탄의 방법으로 전하는가"였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비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너무 예의 없이 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강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등의 예의 없는 전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탄적인 방법으로 전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 그 방법은 진리와 친구여야 합니다. 내용은 진리인데 전하는 방법이 진상이면 진리는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오랫동안 진리를 진리답게 전하질 못했습니다. 물론 진리를 진리답게 전했던 선배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대세는 무례함입니다. 이제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6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His Name
His Name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있을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저작자 표시비영리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같습니다. 118절에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땅에서는 낮아질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것을 꼭꼭 집어주는 조금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공감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6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밀양
감독 이창동 (2007 / 한국)
출연 송강호, 전도연, 조영진, 김영재
상세보기

고린도전서 1117절부터 34절까지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썼던 편지 글이 오늘날 상황에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고린도 교회는 예수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하면서 분열과 분파로 가득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이웃과 협력을 하지 않는 문제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소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데, 성만찬은 매주 또는 한 달에 한 번 하면서 교회가 얼마나 분열과 분파로 가득한지 교회 밖의 분들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고, 이웃들과 협력하지 않는 집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리, 교회법, 논리들이 기독교의 세상과의 협력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주 또는 매달 성찬식을 합니다.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게 사도 바울의 오늘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독교라고 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안티 기독교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요.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의 활동이 이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짓이 가관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기독교에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비난의 화살이 우리에게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 지적을 받다보면 잘못을 알게 되고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적을 하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며 개선하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1132절은 위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더 잘될 수 있도록 하는 징계입니다. 비평이 있어야 좋은 작품이 나오듯, 강한 비난을 통해 기독교가 좀 더 견고한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너무나 성장 위주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뒤옆 돌아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속력을 줄이고 견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33절의 내용처럼 형제를 기다려줘야겠습니다. 분쟁도 줄여야겠습니다. 파당도 없애야겠습니다.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에 감격이 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할 수”(11:26)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15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305)
후원 (1)
운영자 소개 (1)
텔레비전 (12)
영화 (21)
음악 (10)
유명인 (26)
패션 (2)
스포츠 (62)
예술 (1)
게임 (3)
광고 (1)
안티 기독 (1)
엔터테인먼트 일반 (6)
문화 행사 (2)
仁터넷 (21)
Re-formation (38)
새벽 생각 (2)
짧고도 긴 생각 (69)
링크 (14)
사진으로 보는 세상 (3)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