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중심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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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브라이언 채펠 (은성,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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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설교가들은 지금 시대가 '시각적인 지식의 시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설교가들은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커버턴트 신학대학교의 학장이자 강해설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설교자들이 여러 가지 이미지를 설교에 사용하는 것을 이 시대의 악이나 단점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성경 속의 사도들은 자신의 사상을 갑옷이나 달리기 경주, 산 돌, 감람나무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 등의 이미지를 사용해 강조했음을 채플은 설명한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설교는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각적인 지식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설교가들은 각종 이미지 사용을 거부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토저와 같은 이는 이미지 사용을 강력히 비난한 기독교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설교 중 예화라는 것은 바로 이미지 사용과 연관되어 있다.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어떤 상황을 연상하게 되고 이것을 말씀과 연관지어 기억을 하게 하는 것이 예화이다. 오늘날 설교가 중 예화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미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설교나 말씀이 이미지에 종속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조심한다면 설교에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시각에 종속되지 않도록 고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놀라운 열매를 얻어낼 수 있다.

이미지를 말씀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교회는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적절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채플에 따르면 일반 성인들이 1년에 50시간 설교를 듣는다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은 2,000시간이라고 한다. 미국의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업 시간보다 텔레비전 시청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미지를 교회에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수 많은 시각적 사용 시간을 말씀에 구속시키려면 오히려 정면승부가 필요하다. 시각을 말씀으로 끌어와 구속시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2,000시간을 말씀과 연결시킬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이는 가능한 일이다. 다만 두려워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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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디오 미주연합회는 LA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불법신고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지난 한해 동안 미국내 한국비디오가게 100여군데가 문을 닫은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절실했다. 하지만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해당 사이트에 경고서한을 보낼 것이며 시정되지 않을 경우 민사소송 제기와 수사당국에 신고할 것”이라는 이들의 확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컨텐츠를 즐기려는 한인들의 다운로드는 오늘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불법 다운로드, 무엇이 문제이며 합법적 이용방법은 없는가?

Q7 교회에서 신자들을 위해 공개상영하는 경우는?

가능하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청중 또는 관중으로부터 댓가를 받지 않는 경우에 판매용 음반 또는 판매용 영상저작물을 재생하여 일반 공중에게 공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판매용’ 영상저작물일 경우 댓가만 받지 않느다면 공중에 공연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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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용사 벡터맨
채널/시간 챔프 방송종료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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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 국내배우
출생 1973년 5월 23일
신체 키185cm, 체중72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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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라는 배우가 과거 '벡터맨'으로 출연한 것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벡터맨'은 지구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읽으면 정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수십 번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정의는 영어로 Justice입니다. 히브리어로는 Tsedaqah (쩨다카)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초로한 정의를 설명드리고자 하기에 히브리어 원어인 “쩨다까”가 무엇 의미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쩨다까‘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Justice),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정의(Justice)‘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Justice라는 단어는 성경에 1천 회 이상 나오는데 대부분이 ”쩨다까“에 속한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정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비해 수십배 더 자주 성경에 등장한다고 하니 하나님이 ”쩨다까“를 얼마나 중시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시 하셨다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의’하면 ‘나쁜 사람과 대적해 싸우는 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벡터맨' 수준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의에 대한 메시지는 주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저 악한 무리와 싸우는 일이 목표이면 결국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아주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폭력적인 정의로운 일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정의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고용주는 이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거의 노예 부리듯이 합니다. ‘정의’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근로자들을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의를 실현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면 둘 다 이뤄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저 상호간에 감정만 더 상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폭력적인 저항, 평화적인 저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 선생,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함석헌 선생 등은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 당시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군사 정부를 항복하게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3.1 운동이 바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저항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최대한 시도해보고 협상과 모든 것이 막혔을 때 마지막 카드로 들고 나오는 것이니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나서면 그것은 진정으로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From the Pulpit
From the Pulpit by danny.hammontre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예를 들어, 히틀러 암살단이 조직된 것은 비폭력적 저항마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쩨다까”이고 이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 커뮤니티를 회복하는 정의’라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상황에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부정’과 싸워야 합니다. 근로자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이를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고 이들이 다시 해당 업체에서 일하고 경영진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저항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끊임없는 대화와 여론 조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평화 시위를 자주 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속박에서 벗어남’과 ‘회복’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잊고 감정적으로 대처할 경우 ‘정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의 사도 벡터맨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지혜로운 "쩨다카 맨'이 필요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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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ye
Comfort ye by rogiro 저작자 표시비영리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밝은터]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1)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기원전 약 750년 경에 강성한 나라를 이뤘습니다. 강성한 두 나라에 대해 농부 선지자인 아모스와 전문 선지자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이사야서와 아모스서를 읽으면 Says the Lord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들 선지자에게 한 말씀을 그들이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 분인지 그분은 어떤 분인지에 대한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염려하며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는 힘을 싫어하고 선량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자들을 혐오하는 분입니다.

재미난 사실은 두 나라는 종교적으로는 풍성한 나라입니다. 종교적인 예식이 이 두 나라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선지자는 이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노여움을 두 선지자가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공의를 원하는 분입니다. 은혜와 자유 속에서 질서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서 115절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하는 짓이 혐오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공의를 구하고, 압제된 자를 구하고, 고아를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회에서 눌린 자, 힘이 없는 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인생 자체가 죄로 가득하지만 그러한 공의를 구하는 자의 죄는 눈처럼 희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서에서도 하나님은 농부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고 계십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들에게 불을 내리겠다는 메시지를 아모스를 통해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과 행동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혼내주는 게 핵심이 아니라 혼나기 전에 생각과 행동을 바꾸라는 일종의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난 후에 행동을 바꾸죠. 벌을 선 후에 행동이 수정됩니다. 그 전에 바꾸라는 경고는 어떻게 보면 사랑입니다.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계속 간섭하는 것입니다. 흑돼지를 치는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흑돼지를 낮에는 방목해서 키우고 밤에는 축사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분이 방목을 하면서도 저녁 시간이 되어 축사로 들어오는 어떤 음성 신호를 보내면 흑돼지들이 말을 너무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했기에 그게 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말씀이 아닙니다)을 듣고 알게 된 아이들은 커서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아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보다는 대중 문화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쏟아내는 잘못된 메시지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온통 연예인들 이야기이고 연예인들의 훈훈한 이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내용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내용에 대해서는 칙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용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는 프로그램의 '단비'는 공익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놀랍고 놀라운 프로그램입니다. 김영희 PD는 아모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인터넷, 대중문화, 언론을 뒤덮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질투와 미움이 대중문화의 주요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묵묵히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 풍요 속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자리 싸움, 교리 논쟁, 교단 편가르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종교는 있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뜻은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이사야와 아모스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소위 말하는 전문 사역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농부였던 아모스를 쓰셨던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일들이 줄어들어야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2장에는 우리에게 화나나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화해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더라도 그것을 눈처럼 희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것을 알면 구속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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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e Yang
    2010/06/05 10:0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24절- (공동번역)


석규 군 하늘나라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진짜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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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미주 중앙일보 2009년 9월24일자 종교면에 실렸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좀 더 큰 크기의 글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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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rable darling
Adorable darling by Umang Dutt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기독교 성서 신명기(Deuteronomy) 큐티를 하면서 대중문화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여러분의 의견, 조언, 코멘트 등을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게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라는 내용을 교회에서 자주 듣게 됩니다. 이 내용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신명기 8장과 누가복음 4장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떡과 하나님 말씀을 분리시킵니다. 밥 먹는 일에 너무 매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세상에서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귀하고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잘못 배우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자꾸 분리시키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떡(bread)은 인간이 만든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것에 기인하는 말입니다. , 하나님 말씀은 곧 인간의 먹을 것, 살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먹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 안을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하나님 말씀
,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치 우리의 묵상, 우리의 말씀 공부만으로 착각하기 쉬운 구절이 바로 신명기 8장에 나오는 이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고파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리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8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덩어리를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의 내용으로 답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게 아니다라고. 예수님은 내가 지금 못 먹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떡을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 말씀이 떡을 먹지 말라고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사탄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강조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미래에 주어질 것은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 눈앞에 놓인 떡, 내가 만든 떡에만 집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실 떡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떡을 기대할 때 조바심이 사라집니다.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시간이 맞지 않아 하나님은 없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나를 내리신 하나님을 못 믿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약속의 땅으로 못 갔더니 다른 신을 섬기기 시작하는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일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금 인간이 만든 떡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가 필요합니다. 그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인간이 해석한 이유는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인간이 만든 떡을 그들에게 나눠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만나를 내리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만든 떡이나 하나님의 떡이나 그 근간은 같다는 말입니다.


이승기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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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카페 가수 이승기 공식 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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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주 / 탤런트
출생 1987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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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카페 〈T.E.A〉- The bEst Actress 한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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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이승기의 조모는 회사 운영을 길거리에서 만난 한효주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조모의 말 한마디면 그의 유산은 한효주에게 돌아갑니다. 말씀이 평생 먹을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회장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할머니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한효주는 할머니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떡과 하나님 말씀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먹고 사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의 말씀이 내리면 우리의 어려움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기가 할머니에게 졸라대도 유산을 주는 게 아닙니다. 할머니는 준비가 되어 있는 한효주에게 유산을 주려고 합니다. 나중에 이승기가 준비된 상속자가 되자 할머니의 말씀이 내려집니다.

인간의 떡은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떡이 있어야 먹고 사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으로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밥 먹는 문제는 해결됩니다. 일부 아프리카인과 홈리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은 밥은 먹고 삽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사는 것 같으면서도 더 깊은 인간의 바닥까지가면 그의 은혜로 사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의 말씀 덕분에 밥을 먹고 살았던 것을 믿지 않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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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씨가 최근 무릎팍 도사라는 MBC 방송에 출연해 여성 할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아는 베티라는 케냐 출신의 여성 인권 운동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티가 많은 분의 도움을 받길 기도합니다.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더 큰 크기로 칼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위 칼럼은 미주중앙일보 2009년 9월26일자에 실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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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3 00:0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도 그 방송 보았습니다.
    인간이 할수있는 최악의 인권유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울 수 없는 저 자신이 안타깝네요.
    • 밝은터
      2009/09/03 20:55
      댓글 주소 수정/삭제
      JiNi님의 댓글을 읽으니 더욱 안타깝네요...


안철수 교수님이 '황금어장'이라는 프로에 출연한 내용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 주요 일간지에 그 이야기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네요. 이 프로에서 안 교수는 비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마침 우연의 일치인지 하늘의 뜻인지 제가 쓴 글도 비효율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주 중앙일보 종교란에 쓴 글입니다. 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원본 칼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글 작성자: 밝은터
게재일: 2009년 6월17일(미국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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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7 22:2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동감합니다.
    비효율의 사랑, 저도 동참하길 원합니다.
    • 2009/06/1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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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비효율의 사랑에 많은 이가 동참한다면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2. Joe Yang
    2009/06/20 08:4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머리 속에 가득차 있는 생활화된 '계산'적 사랑을 예수님은 가르치신 적이 없는데 사랑하다가 지워져버릴지 모르는 헛사랑에 빠져있지않는지요? 사랑을 입으로 하긴 보단 비효울적인 방법으로 손으로 그리고 걸어가서 눈으로 가슴으로 하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길 기대하기 전에 나 부터서 '비효율성'사랑을 헤찰 않고(한눈을 팔지않고) 한결같이 해나가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먹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TV 드라마에 미니시리즈가 있다면 인생은 고통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 고통, 소외감, 거절감, 실망, 배신, 고투 등이 시리즈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통이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고통이 밀려드는 것일까요.

아내의 유혹
채널/시간 SBS 월~금 저녁 7시 20분 (2008년 10월 27일 방송예정)
출연진 장서희, 변우민, 김서형, 오영실, 정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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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선배들은 고통을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했습니다
. 사도 베드로의 멘토링이 도움이 됩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219. 이하 표준새번역). 이 말을 한 후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1-23)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던 분인데 그는 고통을 결코 즐기지 않았습니다
. 그는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도 고통을 비껴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고난을 당하면
, 고통을 당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온통 축복 마인드를 갖고 있는 분은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영성이 있는 자들도 고난을 기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기에는 선생 예수의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은 고난과 고통입니다. 이는 죄를 대신 지는 자의 고난과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이후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고통 짊어짐을 이어 받기 시작했습니다.


     IVP에서 발행한 신학사전(IVP New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고난(Suffering)’을 찾아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구약은 순종의 대가로 번영을 약속한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기대(expect)하셨고, 사도들도 그러했다.”
[1]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신약적 생각 21세기 들어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그 해결방법을 찾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성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고통은 이성, 과학, 의학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 깊이 파고들어옵니다. 


     고통은 과거의 죄나 잘못에 대한 대가로 받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미래지향적입니다
. 사도 베드로는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6:7) 히브리서에도 고통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말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8) 예수님은 또한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되셨습니다.(히브리서 2:10) 사도 바울은 육체의 고난을 통해 교만함이 수그러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

     바울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고통을 즐기는 이는 없습니다.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28절에 보면 바울은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의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린도전서 12:9)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에 대해 사도 바울이 받은 응답입니다. 호크마주석은 바울의 고통과 간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2]


     우리는 이런 내용을 알면서도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바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고통에는 위로가 있고 그 위로가 다른 고난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 3-6)


     J.I. 패커, 싱클레어 B. 퍼거슨, 데이빗 F. 라이트 등 뛰어난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편찬한 IVP 신학사전에서 고난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뛰어난 인사이트(insight)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인류에 속한 결과로써 고난을 당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고난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자초할 수 있다. 그들도 슬픔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고난 속에서 구원을 받지, 그러한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인류와 함께 그러한 고난을 겪으며 그러한 고난에 취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쓰신다는 것과,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자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나머지 인류과 크게 다르다. 히브리서 12:5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에 무관심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라고 훈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연단하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을 받을 자격을 구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3]

고통의 문제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C. S. 루이스 (홍성사, 2002년)
상세보기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에 대해 다음과 이야기합니다. 그는 고통의 가능성은 영혼들이 서로 마주치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혼들이 악해질 때에는 틀림없이 이런 가능성을 이용하여 서로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겪는 고통의 5분의 4는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문과 채찍과 감옥과 노예와 총과 총검과 폭탄을 만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과로는 자연의 심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내지는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4]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인간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고통 역시 많이 있습니다.

     존 골딩게이의 설명은 고난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알게해 줍니다
.


     “고난에 대한 구약의 태도들의 다양성은 하나님이 서로 다른 상황들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난에 개입하였을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때로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교화 목적을 수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의적으로 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긍정적인 목적을 갖는 불유쾌한 경험을 사람들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오게 되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오게 되는 고난으로부터 미래의 구원을 약속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5]


      어떤 상황이든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못할 일 전혀 없는 하나님은 왜 이처럼 못된 인간들이 동료들을 괴롭히는 경우를 그토록 엄청나게 허용하실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연약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에게는 천국에의 소망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조시 맥다월 목사도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고통과 고난이 있지만 그것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꿈꾸는 파라다이스로 가게 될 것[6]이라고 했습니다.

저명한 신약신학자였던 G.E. 래드는 유명한 책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는 예수님 공생애 3년 동안 핵심 메시지였다[7]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고통과 고난을 접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고통과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 나라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겨자씨처럼 우리에게 다가 와 있다는 것입니다. 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악인과 선인은 함께 한 사회 속에서, 한 단체 속에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공존하는 것입니다.”[8]

    



[1] IVP 신학사전, p.60

[2] 호크마주석, ‘고린도후서

[3] IVP 신학사전, p.61

[4]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p135

[5]존 골딘게이, 구약의 권위와 신약적 다양성, p.53

[6] 자시 맥다월l, ‘준비된 방어(A Ready Defense)’, p.412

[7] 조지 엘든 래드, ‘하나님 나라의 복음,’ p.16

[8] 래드,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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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ver
    2009/06/16 22:2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어느 누구는 이야기 했습니다. 좋은 것만 있으면 어떻게 좋은 것을 알겠냐구요...아마도 천국에는 않좋은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더 좋음을 느끼지 않을 까...
    저는 고통의 세상을 경험하고 가는 곳이기 때문에 더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그 나라를 전하기 위해 친히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 2009/06/17 22:55
      댓글 주소 수정/삭제
      고통을 알아야 좋은 것을 알 수 있다...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경: 로마서 18-16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

아메리칸 아이돌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하나로 대중가수의 등용문이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알려졌죠. 프로그램에 기독교 찬양곡인 Shout to the Lord 울려퍼졌습니다. 한국어 번역곡은 구주 예수님 제목입니다. 아메리칸 아이돌과 가스펠 찬양이 어울릴까요? 어울리지 않을 같았는데, 유투브(youtube.com) 동영상을 보고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투브에서 ’American Idol Top 8 Season 7 - Shout To The Lord라는 검색어로 동영상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보세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스펠 콘서트가 아니라 미국 최고의 프로그램인 아메리칸 아이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공연입니다. 저는 동영상을 보면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리처드 마우 풀러신학대학원 총장의 강의를 어제 들었는데 동영상을 토론이 있었습니다. “세속적인 , 그것도 우상(Idol)이라는 제목이 있는 쇼에서 찬양곡이 나오는 것은 어색하다 의견이 있는 하면 복음을 듣지 못했던 분들이 영감을 얻을 있다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상을 보면서 토의를 들으면서 굉장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학생이 엉망으로 사는 스타들이 하나님께 감사한다 말을 때마다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오늘 동영상은 달랐다 말했는데 저도 그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음악은 말과는 다른 같습니다. 음악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동을 표현할 있기에 다른 느낌이 듭니다. 말은 이성(reason)이라면 음악은 감성(affection)이라고 있습니다. 마우 총장은 사람이 어떤 마음(heart) 생기면 의지(Will)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성(Reason) 움직이게 된다고 합니다. 영상은 마음이 생길 있는 계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 복음에서


로마서
1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Righteousness)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낮아짐입니다. 혼내는 하나님, 성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진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낮아짐의 미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낮아졌을까요? 바로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세상을 만든 신이 거룩한 자리에 점잖게 있었던 아니라 지저분하고 말도 지긋지긋 듣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천한 자리에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 최악의 처형인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구하겠다고 하신 결심이 바로 의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결단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개미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 말로 형용할 없는 놀라운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가 바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은 믿음에 근거한다고 했습니다 ( 117).

하나님의
의를 마음(heart) 속에 믿게 되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믿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정말로 믿겨지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겨지면 교회를 50 다녔어서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정말로믿게 되면 에너지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능력이 함께 합니다. 능력을 계속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주 무너지는 이유는 바로 성령의 능력이 있다가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마음(heart) 사라지면 강한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자들을 얻으려고 엄청난 거리(distance)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인종과 지역을 초월합니다. 믿는 자가 많아지면 격려하는 자도 많아져( 112) 믿음을 잃지 않을 가능성이 더욱 커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서로 격려할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 ,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 설교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의와 복음을 말로, 찬양인도자는 그의 의와 복음을 음악으로,  다른 봉사자는 의와 복음을 몸의 헌신으로 표현하며 격려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정리를 해봅니다.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기독교 찬양곡을 부르는 , 그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을 준비한 자들의 마음 가짐이 어떤지도 중요합니다. 제대로 마음으로 했다면 행위는 반가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엉망인(messy)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적용

시스템이 되어 있는 교회, 편하게 다닐 있는 교회, 설교자가 말을 하는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교회를 찾기를 바랍니다. 도덕생활을 강조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그의 복음이 정확히 전달되고 그것이 위로가 되는 교회를 찾아야겠습니다. 성경은 도덕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발견하는 책입니다.

 

Think deeper

기도하고 부르짖고 곤경에 처한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수는 있지만 우리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갈망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느끼는 바를 그대로 느끼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애타게 바란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소식이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가 바라는 바로 분이라는 사실이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 예수님밖에는 우리를 아는 없네.”  ( 하이벨스, ‘예수: 예수를 많이 알려면’,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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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9 14:1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멘!
    트랙백 보고 왔습니다. 감동이네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어찌나 놀라운지.^^

    "엉망으로 사는 스타들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어색하게 느껴졌다" 라는 그 학생의 말에 매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 학생이 말한 엉망으로 사는 스타가 누구인지, 또 '엉망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완벽하지 않고 매일 실수를 하며 사는데 말예요..
    주님 보시기엔 다 같을텐데요..ㅎㅎ

    그 사람의 하루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뛸듯이 기뻐하시는 주님이시니,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겠어요..^^

    이건 여담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많은 연예인들이 엉망으로 살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비춰질 뿐이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경우도 있는가보더라구요.
    • 2009/04/09 14:2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반갑습니다. Grace님. 미국 연예인들은 생활이 좀 그래서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습니다. Grace님의 이름처럼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죠. 맞아요! 억울하게 비춰지는 연예인들도 있겠죠...댓글에 감사합니다.
  2. ahn
    2009/04/09 19:1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도 들으며 전율이 느껴지네요.
    분리하고 편을 가르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소외되고, 병들고, 자탄 받고,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영상에 감동받고 글에 큰 감동 받았습니다.
    • 2009/04/09 21:3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반갑습니다.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너무나 기쁘고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감하는 분들을 보내주시는군요. 관계적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말씀: 로마서 1장1절-7절


복음은 무엇일까( 11)

복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교회를 다니시지 않거나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복음이라는 말을 번도 듣지 못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the Gospel)’ 사전에서 찾아보니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라고 나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은 우리를 정말로 기쁘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반갑고 즐거운 소식이 그렇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갑고 기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많은 이에게 굴레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배우 배용준 씨가 욘사마(the lord Yon) 불립니다. 욘사마가 되었을까요? 일본 여성들에게 복음 던졌기 때문입니다. ‘겨울 연가(Winter Sonata)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용준 씨는 일본 여성들에게 따뜻한 남자’ ‘돌봐주는 남자 비춰집니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주인공에게 부여된 허상입니다. 그럼에도 남성우월주의적 사회에서 배용준이라는 배우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매우 반갑고 즐거운 소식인 것입니다. 최근 한류에 관한 영문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학자들은 겨울 연가라는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수준이었다는 동의합니다. 제가 아는 대만 여성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4번이나 봤다고 고백했습니다. 드라마에도 역시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갖고 있는데도 전하지 못함

성경은 진짜 복음 담고 있지만 이것을 일부 교회와 교회 리더들이 복음으로 전하지 않고 부음(訃音)으로 전하는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합니다. 부음은 모두 아시겠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기별입니다. 이상하게 복음을 들어야 우리는 부음 듣는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교회에선 복음 전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부음처럼 들릴까요. 그럴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 복음이 전해지는 아니라 내가 복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든 복음이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 일본 여성들에게 (the lord)’ 것처럼 예수님은 크리스천에게 (the Lord) 되시는 것입니다. 겨울 연가가 따뜻한 남자,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줬다면 예수 복음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the Lord Jesus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복음이 아름다운 이유

예수 복음이 욘사마 복음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욘마사가 드라마에서 주는 기쁨에 비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 17)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평화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너는 앞으로 문제가 없을 거야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가 있는 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론 힘들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에 예수 복음을 접하면 다시 평화와 은혜를 예수께서 주십니다. 일본 여성들은 욘사마 복음 믿고 순종( 1:5)하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쁨, 영원한 평강을 주는 예수 복음은 말로 형용할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말로 표현해도 없습니다. 체험해보시고 싶으십니까? 지금 눈을 감고 예수께 간절히 기도해보십시오. 당장 무슨 변화가 없는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실한 우리의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울 , 가장 바쁠 , 가장 고통 받을 , 우리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듣고서도 속에서 그것을 누리고 살지 못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나는 은혜와 평화를 얼마나 누리고 살고 있을까. 누리지 못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복음을 생각하고 은혜와 평화를 누리길 기대해봅니다.

Think Deeper

창녀나  세리들은 분이(예수님이) 그들의 직업적 평판에는 관심이 적은 대신 그들의 영혼에 담긴 슬픔과, 그들의 삶을 지경으로까지 몰고 사망의 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주목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깨끗한 영혼을 원했고, 예수님은 용서와 구속을 통해 그들을 도울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이 그분의 복음이었다. <고든 맥도날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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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9 15:2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2. 2009/04/09 21:3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맞습니다. 동감합니다. 주님께서 문화 속에서 하시는 일들...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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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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