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설교가들은 지금 시대가 '시각적인 지식의 시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설교가들은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커버턴트 신학대학교의 학장이자 강해설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설교자들이 여러 가지 이미지를 설교에 사용하는 것을 이 시대의 악이나 단점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성경 속의 사도들은 자신의 사상을 갑옷이나 달리기 경주, 산 돌, 감람나무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 등의 이미지를 사용해 강조했음을 채플은 설명한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설교는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각적인 지식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설교가들은 각종 이미지 사용을 거부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토저와 같은 이는 이미지 사용을 강력히 비난한 기독교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설교 중 예화라는 것은 바로 이미지 사용과 연관되어 있다.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어떤 상황을 연상하게 되고 이것을 말씀과 연관지어 기억을 하게 하는 것이 예화이다. 오늘날 설교가 중 예화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미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설교나 말씀이 이미지에 종속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조심한다면 설교에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시각에 종속되지 않도록 고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놀라운 열매를 얻어낼 수 있다.
이미지를 말씀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교회는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적절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채플에 따르면 일반 성인들이 1년에 50시간 설교를 듣는다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은 2,000시간이라고 한다. 미국의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업 시간보다 텔레비전 시청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미지를 교회에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수 많은 시각적 사용 시간을 말씀에 구속시키려면 오히려 정면승부가 필요하다. 시각을 말씀으로 끌어와 구속시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2,000시간을 말씀과 연결시킬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이는 가능한 일이다. 다만 두려워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밝은터]
한국비디오 미주연합회는 LA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불법신고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지난 한해 동안 미국내 한국비디오가게 100여군데가 문을 닫은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절실했다. 하지만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해당 사이트에 경고서한을 보낼 것이며 시정되지 않을 경우 민사소송 제기와 수사당국에 신고할 것”이라는 이들의 확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컨텐츠를 즐기려는 한인들의 다운로드는 오늘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불법 다운로드, 무엇이 문제이며 합법적 이용방법은 없는가?
Q7 교회에서 신자들을 위해 공개상영하는 경우는?
가능하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청중 또는 관중으로부터 댓가를 받지 않는 경우에 판매용 음반 또는 판매용 영상저작물을 재생하여 일반 공중에게 공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판매용’ 영상저작물일 경우 댓가만 받지 않느다면 공중에 공연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벡터맨'은 지구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읽으면 정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수십 번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정의는 영어로 Justice입니다. 히브리어로는 Tsedaqah (쩨다카)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초로한 정의를 설명드리고자 하기에 히브리어 원어인 “쩨다까”가 무엇 의미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쩨다까‘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Justice),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정의(Justice)‘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Justice라는 단어는 성경에 1천 회 이상 나오는데 대부분이 ”쩨다까“에 속한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정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비해 수십배 더 자주 성경에 등장한다고 하니 하나님이 ”쩨다까“를 얼마나 중시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시 하셨다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의’하면 ‘나쁜 사람과 대적해 싸우는 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벡터맨' 수준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의에 대한 메시지는 주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저 악한 무리와 싸우는 일이 목표이면 결국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아주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폭력적인 정의로운 일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정의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고용주는 이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거의 노예 부리듯이 합니다. ‘정의’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근로자들을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의를 실현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면 둘 다 이뤄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저 상호간에 감정만 더 상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폭력적인 저항, 평화적인 저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 선생,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함석헌 선생 등은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 당시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군사 정부를 항복하게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3.1 운동이 바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저항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최대한 시도해보고 협상과 모든 것이 막혔을 때 마지막 카드로 들고 나오는 것이니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나서면 그것은 진정으로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 씌어졌던 시점은 기원전 750년부터 기원전 715년 사이인 것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기원전 750년 전쯤에 예언을 했고 기원전 715년까지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서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는 자였고 아모스는 남부 유다에서 농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예언 또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모스는 유다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고 이사야는 남부 유다에 살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모스의 말은 아무래도 무시했겠죠. 오늘날도 치자면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유다 출신의 시골 농부가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예언을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사야와 아모스를 읽으면서 재미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맞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밝은터]
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1)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기원전 약 750년 경에 강성한 나라를 이뤘습니다. 강성한 두 나라에 대해 농부 선지자인 아모스와 ‘전문 선지자’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이사야서와 아모스서를 읽으면 Says the Lord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들 선지자에게 한 말씀을 그들이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 분인지 그분은 어떤 분인지에 대한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염려하며 가난한 자들을 괴롭히는 힘을 싫어하고 선량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자들을 혐오하는 분입니다.
재미난 사실은 두 나라는 종교적으로는 풍성한 나라입니다. 종교적인 예식이 이 두 나라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선지자는 이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노여움을 두 선지자가 대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공의를 원하는 분입니다. 은혜와 자유 속에서 질서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서 1장15절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하는 짓이 혐오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공의를 구하고, 압제된 자를 구하고, 고아를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회에서 눌린 자, 힘이 없는 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인생 자체가 죄로 가득하지만 그러한 공의를 구하는 자의 죄는 눈처럼 희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서에서도 하나님은 농부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고 계십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들에게 불을 내리겠다는 메시지를 아모스를 통해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과 행동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혼내주는 게 핵심이 아니라 혼나기 전에 생각과 행동을 바꾸라는 일종의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혼난 후에 행동을 바꾸죠. 벌을 선 후에 행동이 수정됩니다. 그 전에 바꾸라는 경고는 어떻게 보면 사랑입니다.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계속 간섭하는 것입니다. 흑돼지를 치는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흑돼지를 낮에는 방목해서 키우고 밤에는 축사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분이 방목을 하면서도 저녁 시간이 되어 축사로 들어오는 어떤 음성 신호를 보내면 흑돼지들이 말을 너무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했기에 그게 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말씀이 아닙니다)을 듣고 알게 된 아이들은 커서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아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보다는 대중 문화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쏟아내는 잘못된 메시지에 영향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온통 연예인들 이야기이고 연예인들의 훈훈한 이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내용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내용에 대해서는 ‘칙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용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는 프로그램의 '단비'는 공익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놀랍고 놀라운 프로그램입니다. 김영희 PD는 아모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인터넷, 대중문화, 언론을 뒤덮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질투와 미움이 대중문화의 주요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묵묵히 소외된 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 풍요 속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자리 싸움, 교리 논쟁, 교단 편가르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종교는 있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뜻은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이사야와 아모스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소위 말하는 ‘전문 사역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농부였던 아모스를 쓰셨던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일들이 줄어들어야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2장에는 우리에게 화나나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화해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더라도 그것을 눈처럼 희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하나님입니다.
기독교 성서 신명기(Deuteronomy) 큐티를 하면서 대중문화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여러분의 의견, 조언, 코멘트 등을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게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라는 내용을 교회에서 자주 듣게 됩니다. 이 내용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신명기 8장과 누가복음 4장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떡과 하나님 말씀을 분리시킵니다. 밥 먹는 일에 너무 매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세상에서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귀하고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잘못 배우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자꾸 분리시키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떡(bread)은 인간이 만든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것에 기인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은 곧 인간의 먹을 것, 살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먹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 안을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치 우리의 묵상, 우리의 말씀 공부만으로 착각하기 쉬운 구절이 바로 신명기 8장에 나오는 이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고파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리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8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덩어리를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의 내용으로 답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게 아니다”라고. 예수님은 “내가 지금 못 먹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떡을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 말씀이 떡을 먹지 말라고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사탄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강조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미래에 주어질 것은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 눈앞에 놓인 떡, 내가 만든 떡에만 집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실 떡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떡을 기대할 때 조바심이 사라집니다.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시간이 맞지 않아 하나님은 없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나를 내리신 하나님을 못 믿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약속의 땅으로 못 갔더니 다른 신을 섬기기 시작하는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일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금 인간이 만든 떡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가 필요합니다. 그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인간이 해석한 이유는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인간이 만든 떡을 그들에게 나눠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만나를 내리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만든 떡이나 하나님의 떡이나 그 근간은 같다는 말입니다.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이승기의 조모는 회사 운영을 길거리에서 만난 한효주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조모의 말 한마디면 그의 유산은 한효주에게 돌아갑니다. 말씀이 평생 먹을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회장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할머니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한효주는 할머니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떡과 하나님 말씀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먹고 사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의 말씀이 내리면 우리의 어려움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기가 할머니에게 졸라대도 유산을 주는 게 아닙니다. 할머니는 준비가 되어 있는 한효주에게 유산을 주려고 합니다. 나중에 이승기가 준비된 상속자가 되자 할머니의 말씀이 내려집니다.
인간의 떡은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떡이 있어야 먹고 사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으로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밥 먹는 문제는 해결됩니다. 일부 아프리카인과 홈리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은 밥은 먹고 삽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사는 것 같으면서도 더 깊은 인간의 바닥까지가면 그의 은혜로 사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의 말씀 덕분에 밥을 먹고 살았던 것을 믿지 않고 살았습니다.
안철수 교수님이 '황금어장'이라는 프로에 출연한 내용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 주요 일간지에 그 이야기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네요. 이 프로에서 안 교수는 비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마침 우연의 일치인지 하늘의 뜻인지 제가 쓴 글도 비효율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주 중앙일보 종교란에 쓴 글입니다. 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원본 칼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TV 드라마에 미니시리즈가 있다면 인생은 고통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 고통, 소외감, 거절감, 실망, 배신, 고투 등이 시리즈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통이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고통이 밀려드는 것일까요.
신앙의 선배들은 고통을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멘토링이 도움이 됩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19절. 이하 표준새번역). 이 말을 한 후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21절-23절)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던 분인데 그는 고통을 결코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도 고통을 비껴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고난을 당하면, 고통을 당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온통 축복 마인드를 갖고 있는 분은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영성이 있는 자들도 고난을 기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기에는 선생 예수의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은 고난과 고통입니다. 이는 죄를 대신 지는 자의 고난과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이후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고통 짊어짐을 이어 받기 시작했습니다.
IVP에서 발행한 신학사전(IVP New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고난(Suffering)’을 찾아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구약은 순종의 대가로 번영을 약속한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기대(expect)하셨고, 사도들도 그러했다.”[1]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신약적 생각’은 21세기 들어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그 해결방법을 찾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성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고통은 이성, 과학, 의학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 깊이 파고들어옵니다.
고통은 과거의 죄나 잘못에 대한 대가로 받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미래지향적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6:7) 히브리서에도 고통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말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8) 예수님은 또한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되셨습니다.(히브리서 2:10) 사도 바울은 육체의 고난을 통해 교만함이 수그러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
바울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고통을 즐기는 이는 없습니다.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보면 바울은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의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린도전서 12:9)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에 대해 사도 바울이 받은 응답입니다. 호크마주석은 바울의 고통과 간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2]
우리는 이런 내용을 알면서도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바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고통에는 위로가 있고 그 위로가 다른 고난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6절)
J.I. 패커, 싱클레어 B. 퍼거슨, 데이빗 F. 라이트 등 뛰어난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편찬한 IVP 신학사전에서 고난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뛰어난 인사이트(insight)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인류에 속한 결과로써 고난을 당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고난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자초할 수 있다. 그들도 슬픔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고난 속에서 구원을 받지, 그러한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인류와 함께 그러한 고난을 겪으며 그러한 고난에 취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쓰신다는 것과,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자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나머지 인류과 크게 다르다. 히브리서 12:5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에 무관심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라고 훈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연단하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을 받을 자격을 구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3]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에 대해 다음과 이야기합니다. 그는 “고통의 가능성은 영혼들이 서로 마주치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혼들이 악해질 때에는 틀림없이 이런 가능성을 이용하여 서로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겪는 고통의 5분의 4는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문과 채찍과 감옥과 노예와 총과 총검과 폭탄을 만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과로는 자연의 심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내지는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4]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인간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고통 역시 많이 있습니다.
존 골딩게이의 설명은 고난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알게해 줍니다.
“고난에 대한 구약의 태도들의 다양성은 하나님이 서로 다른 상황들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난에 개입하였을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때로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교화 목적을 수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의적으로 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긍정적인 목적을 갖는 불유쾌한 경험을 사람들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오게 되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오게 되는 고난으로부터 미래의 구원을 약속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5]
어떤 상황이든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못할 일 전혀 없는 하나님은 왜 이처럼 못된 인간들이 동료들을 괴롭히는 경우를 그토록 엄청나게 허용하실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연약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에게는 천국에의 소망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조시 맥다월 목사도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고통과 고난이 있지만 그것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꿈꾸는 파라다이스로 가게 될 것”[6]이라고 했습니다.
저명한 신약신학자였던 G.E. 래드는 유명한 책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는 예수님 공생애 3년 동안 핵심 메시지였다”[7]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고통과 고난을 접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고통과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 나라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겨자씨처럼 우리에게 다가 와 있다는 것입니다. 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악인과 선인은 함께 한 사회 속에서, 한 단체 속에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공존하는 것입니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