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elding.net/greeklatinaudio/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2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성령님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미풍처럼 잔잔하게 다가온다는 헨리 나우웬의 글에 오늘 아침 마음이 움직인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독과 침묵이 많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는 크신 하나님이 이렇게 세미하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인내와 사랑이 필요할까이고 둘째는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다보면 음성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5분이라도 침묵하는 시간을 갖자. 일하지 않고 다른 생각도 않고 오직 성령님의 음성만 들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밝은터]


나우웬과함께하는아침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도/설교/전도 > 기도/묵상
지은이 헨리 나우웬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새벽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풍과 같으신 성령님  (0) 2011/02/10
기독교 신앙의 역설  (0) 2011/02/08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2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새벽 생각은 새벽 기도에서 들은 말씀을 바탕으로 밝은터가 묵상한 내용, 생각한 내용을 정리하는 코너입니다. 새벽 기도가 더 의미있는 모임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나눔이 있는 코너가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2장1절-10절
http://www.holybible.or.kr/B_RHV/cgi/bibleftxt.php?VR=0&CI=12044&CV=99

귀도(鬼刀) - 칼집끝
귀도(鬼刀) - 칼집끝 by gorekun 저작자 표시비영리

류태우 목사님(베델한인교회 부목사)은 2011년 2월8일 새벽 기도에서 기독교 신앙은 역설이고 낮은 자에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야기했다. 사탄이 육체의 가시를 이용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도 하나님이 선용하신다는 내용에 많은 도전이 됐다. 우리에게는 높아지려는 본성이 있기에 하나님은 이러한 본성을 제어하는 기제로 육체의 가시를 사용하신다는 말씀. 이러한 육체의 가시는 우리의 칼을 숨기는 칼집인 성품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큰 도전이 되었다.

말씀을 들으며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는 왕성한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 자부심이 너무 강해진 자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일 새벽 기도를 나가고, 예배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하고, 관계에서 엄청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낮은 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공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은 자가 되지 않으면 주의 크신 능력이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은 굉장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열거된 일들이 낮은 자가 되도록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칼집에 대한 생각이다. 칼집에 칼을 집어넣으면 던지면서 놀 수 있다. 그러나 칼집에서 칼이 조금이라도 삐죽 나오면 위험한 도구가 된다. 칼집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말씀을 들으며 나에게 밀려든 생각이었다. 내가 인격을 닦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들, 주의 은혜 없이는 칼날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특히 죽음 직전에는 더욱 그렇다.

주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들. 칼집에 칼을 넣지 못하는 우리들. 낮은 자가 되지 못하는 우리들. 그것이 예수의 복음을 가리게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의 마음이 든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새벽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풍과 같으신 성령님  (0) 2011/02/10
기독교 신앙의 역설  (0) 2011/02/08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성경 역본에 관한 이야기가 http://www.biblenara.com/sub/in_3_6.htm 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주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링크를 만듭니다. 혹시 링크가 깨질 경우 첨부한 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요즘
한국에서는 안티 기독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소수의 안티 기독 운동가들은 잠재세력을 자극해서 기독교 복음이 흔들리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안티 기독 활동의 시조는 사도 바울이었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바울은 예수의 제자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91절을 읽어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 다음으로 기독교 선교사 최고의 인물인 바울이 살기가 등등해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잠시 pause]



스테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는 장면에 대해 성경기자는 사울이 이를 마땅히 여겼다고 적는다 (사도행전 7:60).

바울의 안티 기독 활동은 오늘날 한국에서의 그것과 비교하면 잔인하다고 있다. 초기 기독교 태동 당시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50마일 ( 241km) 거리에 있는 다마스커스(다메섹) 피신한 상황이었다. 바울은 그러나 기독교인을 박멸하기 위해 그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에게 일종의 체포권 받았다. 이는 한국의 안티 활동에 비하면 엄청난 열정과 파워 아래에 행해졌다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후에 모든 상황은 역전됐다. 역사상 최악의 안티 기독이었던 바울은 역사상 최고의 기독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바울에게 세례를 아나니아나 그를 믿는 자들에게 소개한 바나바의 역할은 중요했다. 이들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안티 기독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던 인물인 바울의 회심을 주님으로부터 확인하고 바울이 전도 활동을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우리는 안티 기독 활동가였던 바울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있을까. 먼저, 우리는 안티 기독 운동가들이 삶의 근원인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 그들이 돌아올 경우 회심 여부를 분별할 있는 영적인 혜안이 있어야 한다. 아나니아와 바나바와 같은 혜안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우리 속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있을까. 오늘부터 세상의 안티 기독들을 주께서 직접 만나 주셔서 그들이 안티 기독 운동이 아닌 기독 운동에 적극 동참할 있도록 매일 일정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다. 돌로 맞아도 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7:60)”라고 했던 스데반의 영성을 닮아야 한다. 지금 기독교는 당시와는 다르게 파워가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영성이 필요하다. 힘으로 밀어낼 수도 있지만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짐을 연습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힘이 있지만 힘을 행사하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것을 적용할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기본으로 돌아가면 교회는 어떤 핍박과 박해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아나니아, 바나바, 스데반의 영성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안티 기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티 기독의 시조는...  (0) 2011/01/28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최근 어떤 교회를 방문해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에서 설교자이신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었는데 내가 옛날에 했던 말이 그대로 이 책에 있어서 약간은 실망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목사가 했던 말들을 묶은 듯한 책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말이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릭 워렌 목사가 쓴 베스트 셀러다.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긍정의 힘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판매됐다고 한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다지 깊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책은 베스트 셀러이고 더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책은 잘 팔리지 않을까. 이 사람이 말하면 대박 설교인데 저 사람이 말하면 평범한 설교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하나님의 쓰심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는 평범 그 자체였다.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많은 영혼을 움직였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쓰심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 그저 돌팔매질로 끝나지만 다윗이 하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파워를 갖게 된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평범한 노래가 되지만 위대한 가수가 부르면 영혼을 움직이는 무엇이 된다. 이 모두 하나님의 얼마만큼 개입하시는 가의 차이다.

나는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는가가 이슈인 것이다. 그런데 적게 쓰임을 받아도 속상해하고 실망할 이유는 없다. 그 몫도 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작거나 크게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자가 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쓰지 않더라도 우린 이미 행복한 자이다. 대박 설교를 하지 못해도 여전히 감사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족과 설교를 준비하는 대신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작은 일처럼 느껴지는 일에도 하나님이 개입하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한 명에게 집중하는 엄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와 놀아주는 아빠, 고독한 자에게 전화한통 걸어주는 친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소중함을 경험하게 된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6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북한의 동족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있었지만 요즘은 더욱 강해진다.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마음만 있었다.
요즘은 마음이 구체화되는 것 같다.
낮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북한 동족을 살리는 길이다.
내가 돕는 것이 아니라 낮아진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내가 높으면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사진으로 보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 동족을 살린다  (0) 2011/01/21
너무 힘들 때 숨죽임의 시간  (2) 2010/03/13
스티븐 커티스 챕맨  (0) 2010/03/08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전병욱 목사는 한국 21세기 초반부에 한국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개신교 목회자다. 나는 한때 그의 부흥회 CD를 구입해서 들을 정도로 그의 능력 있는 설교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동안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했기에 속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잔잔한 감동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능력은 교만으로 이어졌다. 이는 인간이라면 다 경험하는 일이다. 어느 분야에서 잘 알려지기 시작하면 교만은 내가 아무리 거절해도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 있는 한 교만은 계속 이어진다. 큰 자리에 올랐는데 교만하지 않다면 오히려 사람답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이 영향력 있는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미국 유명대학의 교수 자리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공동체로 자리를 옮겼기에 가능했다.
 
어느 때부터 전병욱 목사의 설교가 듣기에 거북스러웠다.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조소섞인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그의 설교를 듣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와 관련된 사건이 터지기 얼마 전부터 그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다. 설교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남을 지적하지 않았다. 설교가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스캔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날 설교가 뚝 끊겼고 얼마 후 그와 관련된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스캔들은 이미 교회 내와 일부 목회자들 사이에는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했다. 적어도 1,2년은 그런 상황에서 설교를 했던 것이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채 강단에 섰던 것이다. 그 기간의 설교를 일부 되돌려 들었더니 영성있는 설교가 많이 있었다. 그를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든 생각은 영향력 있는 설교가들이 죄인 의식을 갖고 설교를 한다면 얼마나 강력한 설교가 될까 하는 것이었다. ‘잘난 맛에 설교를 하면 귀에는 달콤해도 영혼을 움직이긴 쉽지 않다. 삶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물론 전병욱 목사처럼 스캔들이 있었다면 목회를 중단하고 회개와 용서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의 사건을 보면서 죄인 의식이 목회자들에게는 항상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인이라 강단에 서는 게 아니라 죄인이지만 용서 받고 강단에 선다는 마음이 없이는 성도들의 영혼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들고 대형교회로 성장시킬 수 있지만 그 중에 삶이 송두리채 바뀐 성도들이 주를 이루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기 잘난 맛에 했던 설교 그리고 죄인 의식을 갖고 용서 받은 죄인이 하는 설교는 의미가 크게 다르다. 언젠가는 겸손해진전병욱 목사가 다시 강단에 서서 주께서 얼마나 용서를 잘하시고 얼마나 우리를 보고 마음 아파하시는지를 설교해주면 좋겠다. 그는 분명 하나님이 쓰신 목회자이고 주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는 목회자였다. 그를 위해 기도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4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희진이라는 작사가의 하나님 성경에 나오는그 하나님이 아니다. 최희진 씨가 가수 이루와 사귐을 끝내고 논란을 일으켰고 이는 전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미니홈피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던 최희진 씨는 어느 홈피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올렸다.

  화면캡처 파일 출처: http://v.daum.net/link/9553879 

내용을 보면 일단 자신이 전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음을 인정했다는 것을 있다. 인정한다면 다음에 해야 일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고 엎드리는 것밖에 없다. 심각한 간통죄를 저질렀던 다윗은 죄가 드러난 후에는 철저히 회개했고 철저히 엎드린 있다. 잘못한 후에 다윗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없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최희진 씨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진실을 밝힐 있도록 용기를 주신 나의 아버지 감사한다는 내용을 썼다. 그리고 문단 뒤에 자신의 거짓말을 인정하는 내용을 보탰다. 일단 글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거짓말을 인정하면서 진실이라는 단어를 것은 논리상 맞지 않다. 이는 그가 말하는 주님이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이유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취해야 자세는 통회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내가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구해주세요. 이러한 자세인 것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없다. 무조건 자복하고 회개하고 통회하고 용서를 구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일이 어찌됐든 국민에게 쓸데없는 일로 스트레스를 주고 나라를 뒤흔든 죄를 회개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일관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네티즌이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도 죄를 지을 있고 실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성경 구절을 미니홈피에 올리는 일은 옳지 않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사죄하고 죄에 대해 응당한 처벌을 받는 자이다. 심지어 마음에 죄도 처벌의 위험에 놓인 자가 기독교인인 것이다. 마음에 간음하고 마음에 욕심을 품고 마음에 거짓말을 하고 마음에 명품과 오락을 사모하고 마음에 신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신을 멀리하고 싶어하고 마음에 부모를 미워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마음에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에 대해서도 처벌 받을 것을 두려워해 괴로워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자가 기독교인인 것이다. 이는 나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다. 나는 최희진 씨가 이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의 하나님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밝은터]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왕년의 홈런왕이 몇 년 동안 운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꾸준히 운동한 사회인 야구단의 투수와 상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믿기 힘들겠지만 사회인 야구팀 투수의 공을 잘 못 때려내거나 빗맞은 타구를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에 아무리 잘했다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해당 분야에서 쉬게 되면 보통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된다. 물론 홈런왕 출신이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다시 연습을 시작하면 보통 사람과는 더 빨리 정상 괘도로 오른다.

나도 얼마 전까지 자전거 타기와 3천미터 달리기를 열심히 하다가 최근 2-3일을 뛰지 못했는데 쉬었다가 다시 운동을 하려니 몸이 따라오지 않았다. 매일 운동을 할 때는 날아다닐 것 같았는데 며칠 쉬면 금세 몸이 천근만근이다. 쉬기 이전 상태로 돌리려면 몇 배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물론 아예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좋은 상태로 올라가는 게 좀 더 쉬울 것이다.

Ligando os pontos - Connecting the dots
Ligando os pontos - Connecting the dots by ®oberto'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우리의 영성도 몸과 비슷하다. 과거에는 영성하면 모두가 알아주는 사람이었는데 영성훈련에 게을리하면 평범한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게 말하고 행동한다. 왕년에 청중을 감동시키는 설교가였다 할지라도 지금 영성훈련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때의 그런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 놀라운 기도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얼마 동안 기도생활이 멈추면 아예 기도하지 않은 사람과 거의 비슷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물론 과거에 영성이 뛰어났던 사람이 다시 영성훈련에 열심을 내면 그렇지 않았던 사람에 비해 영성 회복의 시간이 빠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든 영혼이든 끊임 없는 훈련이 없으면 연약한 모습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는 고통을 감수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땀이 나지 않고 살짝 힘든 시점도 없이 운동하는 것은 건강 유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땀도 나고 약간 고통스럽다는 느낌도 들어야 제대로 운동이 되어 육체의 건강이 유지가 된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그 영혼이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통을 통과하면 할수록 영성은 살아난다. 고통을 통과하면 할 수록 영성의 소유주인 하나님과 관통하게 된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러나 죽자고 운동하는 사람들의 건강이 좋은 것을 보면 고통은 불청객은 아닌 듯하다. 역사적으로 영성이 뛰어난 자들은 100% 고통의 훈련을 잘 견뎌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 대표적인 분이셨다.

반가운 소식 하나. 영성이라는 게 분명 있다는 사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스포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성에 필요한 것  (0) 2010/09/11
역사속 예수에 대한 믿음  (0) 2010/07/08
미국 농구계의 전설 존 우든의 십자가  (0) 2010/07/01
월드컵 16강 천국 맛보기  (0) 2010/07/01
LA 타임스 "한국교회의 월드컵 응원..."  (0) 2010/06/26
스포츠와 종교  (0) 2010/02/03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슬람교도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조사가 있다. 미국 이슬람 관계 위원회(CAIR)의 발표에 따르면 70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미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US 뉴스&월드 리포트는 500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미국 내에서 이슬람교도의 수가 증가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증가 추세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왜 개종을 할까? 개인마다 이유가 다를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이슬람교의 율법주의가 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는 은혜를 강조하며 율법에 느슨한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슬람교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킴으로써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좋아 개종을 한다고 한다. 사실 율법에 관하여는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율법은 그들의 신앙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이다. 신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오직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르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엉망으로 살아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쉽게 느껴진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자들은 천국에 가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게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다가선다.

기독교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자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죄인들의 이야기다. 예수님은 완벽한 그들보다는 불완전한 그들과 주로 지내셨다. 당장 그의 열두 제자들이 그랬다. 제자 중에는 당시 사람들이 경멸했던 세리도 있었고 스승을 돈 받고 판 유다도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이는 친구와 길을 가다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친구가 "네 아버지 아니냐"고 물었을 때 "내 아버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였다. 그랬던 베드로는 시간이 지난 후에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고 자신의 스승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전승이 있다. 그것도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한 껍질, 두 껍질을 벗겨보면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수많은 유명인들이 기독교인인데 그들의 삶은 세상에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점점 더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수록 놀라운 사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법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 법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법을 사랑으로 완성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기 전에 기독교인으로서 노출되다보니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된다.

설렁탕을 끓일 때 오래 끓일 수록 진국이 되어 맛있는 국을 먹을 수 있다. 기독교를 볼 때 오래 끓인 기독교인을 봐야 그 진수가 보인다. 맨발의 노인인 최춘선 할아버지가 그런 분 중 한 분일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그런 진국 크리스천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세상에서 지적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진국이 아닌 설렁탕을 먹을 때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진국이 아닌 기독교를 만날 때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예수님을 만나 되는데 그것을 못 하고 '싱거운 설렁탕'이라고 쉽게 포기한다. 그래서 안타깝다. [밝은터]

맨발천사최춘선할아버지(보급판)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어린이기독교 > 어린이기독교일반
지은이 편집부 (규장, 2005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양현승 목사 캐리커처
양목사님 캐리커처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양 목사님과 점심식사를 했다. 양 목사님의 단골 식당이었는데 가격도 싸고 맛 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양 목사님은 그곳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셔서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양 목사님이 평소에 공들인 덕을 내가 보게 된 것이다. 식당에 가서 일하시는 분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음식도 더 맛있게 먹게 된다.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해 두신 덕분에 우리는 그 덕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데 예수님이 친하시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니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오히려 '헤세드(은혜, 자비)'를 경험한다. 이는 예수님 덕분이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미션을 잘 수행하시면서 공들이신 예수님 덕분이다.

우리는 예수님 덕을 보고 있지만 그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다. 내가 잘나서 잘 사는 것 같이 생각이 든다. 식당의 직원이 나에게 친절한 게 아니라 양 목사님과의 관계를 통해 나에게 친절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1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경향신문

1946년 10월 6일 : 천주교 서울 대교구에서 창간.
1954년 11월: 축쇄판 발행.
1957년 7월 : 경향신문 조·석간 발행
1959년 2월 4일 : 경향신문 여적 필화 사건 발생
1959년 4월 30일 : 여적 필화 사건으로 인해 논설위원 주요한이 구속되고, 이승만 정권(자유당 정부)이 지령 4325호로 폐간 결정을 내림.
1960년 3월 : 정부를 상대로 낸 재정신청에서 승소하나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3·15 부정선거를 비판한 결과 정부로부터 무기한 정간 명령을 받음.
1960년 4월 27일 : 이승만 하야 이후 복간.
1962년 2월 : 이준구가 천주교 서울 대교구로부터 신문사를 불하받음(천주교 재단이 경향신문 매각), 주식회사로 출범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 계열이었으나, 1948년 광복 이후에는 친민주당 노선을 견지했다. 제1공화국 기간 내내 국무총리부통령을 지낸 장면(張勉)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때문에 1958년 이승만과 자유당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장면의 인척인 한창우가 사주로 취임하였고, 경향신문은 제2공화국 기간 내내 장면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 민간에게 불하되면서 종교 성향을 띠지 않고 있다. 문화방송 계열사이던 1980년만 해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유럽의 좌경화로 표현하는 등 반공적 논조를 보였으나, 한화 그룹으로부터 독립한 1990년대 말 이후부터는 진보와 개혁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보 성향의 신문이 되었다.[2] 한편 최근 삼성 그룹 관련 및 이명박 정부, 촛불 집회 관련 보도에선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국민일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설립한 신문사이나, 현재는 독립한 상태이며 재단법인 국민문화재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어느 교파에도 소속되지 아니한 민간공익언론이다. 2010년 현재 국민일보의 사장은 조용기 목사의 둘째아들 조민제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NASA Blue Marble 2007 West
NASA Blue Marble 2007 West by NASA Goddard Photo and Video 저작자 표시

세상은 스펙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컴퓨터의 스펙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경력을 말하는 것이다. 경력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경력에 따라 사람이 올라갈 자리가 정해진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나 교회만은 그렇게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 무슨 스펙이 필요한가. 교회 지도자가 스펙이 필요한가. 공부를 하기 위해 공부하는 교회 지도자보다 스펙을 화려하기 위해 공부하는 지도자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가 사람을 스펙으로 판단한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는 목사님은 교회의 장로님이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신앙생활에 열심이고 현재 일하는 곳에서 크리스천답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지 무슨 학교를 나왔고 무슨 공부를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옳다고 본다. 스펙에 따라 교회의 리더를 결정하면 교회는 스펙 때문에 무너진다. 결정적으로 이는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예수님은 스펙에 따라 사람을 뽑지 않았다. 교회 역사를 봐도 그렇다. D.L. 무디의 스펙을 보라. 찰스 스펄전은 어떤가. 스펙만 보면 이들은 설교가나 교회 지도자가 자격이 없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스펙이 화려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아니다. 오늘날 크게 쓰임받고 있는 정식 교육은 고등학교까지가 전부인 그렉 로리 목사는 어떤가. 

스펙이 좋으면 사람들이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런 이유로 추종자가 있더라도 그런 공동체는 콩가루 공동체가 가능성이 크다. 교회는 겸손한 , 순종하는 , 사랑이 풍성한 자를 리더로 뽑아야 한다. 그런데 스펙을 키워주는 신학교에서는 그것을 교육하지 않고 주로 지식을 가르친다. 지식은 중요하고 단체를 이끌어가는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만큼은 지식보다 겸손과 순종과 사랑이 앞서야 한다.

스펙이 좋은 리더들로만 가득한 교회는 자체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이기 어렵다. 스펙이 좋은 사람도 있고 좋지 않은 사람도 있고 그들이 어우러져 동등한 위치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교회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다.

그런데 세상의 잣대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스펙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옳지 않은 현실이 지금 교회를 휩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닌 같다. 요즘 젊은 지도자들 중에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희망은 있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기독교인이나 기독교계 리더가 큰 문제를 일으키면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할 것이지만 명목상의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성토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기독교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는 이땅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없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에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그것이 없음이 입증된다고 믿으며 자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자신의 밥벌이나 권력 유지에 도움이 안 될 경우 기독교인의 비리를 더욱 크게 부르짖고 기독교 박멸에 나선다.

그런데 이 세상에 기독교인들이 다 못된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께서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것을 알리고자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 어떤 종교도 북한에 목숨을 담보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들지 않는다. 오직 기독교만 그렇다. 이유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서다. 기독교는 썩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숭고하고 고귀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못된 하나님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을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읽어보면 얼마나 참고 또 참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기다린 하나님인지 알게 된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보며 하나님을 느낄 수는 없을까. 우주의 신비를 보며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까. 바다를 덮은 물을 보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을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며 그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을 볼 수는 없을까. 들판에 나는 곡식을 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을까.

그런데 예수님만은 사람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어떤 현상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 세상으로 오셨다. 그는 "너희들은 이적을 행할 때만 나를 믿는구나"라고 말했다. 자연 현상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적을 행할 때 잠시 하나님을 믿게 됐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죄된 인간을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위해 특별 사명으로 이 땅에 오셨다
. 인간이 빠지면 예수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의 잘못은 예수님을 가리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꺼풀 벗겨보면 기독교인의 잘못이 예수님을 보게 한다. 잘못 없이 완벽하면 예수님이 필요 없다. 죄로 가득하기에 그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하셨다. 사람의 죄를 보며 예수님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의 죄를 보며 예수님을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그리스도중심의설교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도/설교/전도 > 설교학
지은이 브라이언 채펠 (은성, 1999년)
상세보기

기독교 설교가들은 지금 시대가 '시각적인 지식의 시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설교가들은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커버턴트 신학대학교의 학장이자 강해설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설교자들이 여러 가지 이미지를 설교에 사용하는 것을 이 시대의 악이나 단점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성경 속의 사도들은 자신의 사상을 갑옷이나 달리기 경주, 산 돌, 감람나무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 등의 이미지를 사용해 강조했음을 채플은 설명한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설교는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각적인 지식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설교가들은 각종 이미지 사용을 거부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토저와 같은 이는 이미지 사용을 강력히 비난한 기독교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설교 중 예화라는 것은 바로 이미지 사용과 연관되어 있다.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어떤 상황을 연상하게 되고 이것을 말씀과 연관지어 기억을 하게 하는 것이 예화이다. 오늘날 설교가 중 예화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미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설교나 말씀이 이미지에 종속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조심한다면 설교에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시각에 종속되지 않도록 고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놀라운 열매를 얻어낼 수 있다.

이미지를 말씀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교회는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적절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채플에 따르면 일반 성인들이 1년에 50시간 설교를 듣는다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은 2,000시간이라고 한다. 미국의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업 시간보다 텔레비전 시청시간이 더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미지를 교회에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수 많은 시각적 사용 시간을 말씀에 구속시키려면 오히려 정면승부가 필요하다. 시각을 말씀으로 끌어와 구속시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2,000시간을 말씀과 연결시킬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이는 가능한 일이다. 다만 두려워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6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전에는 내가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온몸 다해 일을 했고 또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을 알면 알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실하게 열정적으로 일해도 주님이 없으면 그것은 극히

제한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주의 손길이 없으면 나의 열심은 나를 올리고 나의 명예를

드높이는 시시한 일이 되고 만다.

주의 도우심이 없는 나의 열심은 인간의 눈에는 위대해

보일지 몰라도 그저그런 일일 뿐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역사를 바꾸어도 그것은 큰 우주에 있는

작은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이다.

그런데 우주의 창조주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은

인간의 눈에 작아 보일지라도 우주적인 역사를 바꾸는

일이 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의 눈에는 우주의 역사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2천년 전 일은 위대한 일이 된다.

21세기에 우리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가 함께 하시면 위대한 일이지만

그가 배제되어 있으면 시시한 일이 된다.

난 그걸 보지 못했다.


시시한 학교를 다녀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위대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고

남들이 무시하는 일을 하고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시한 품삯을 받아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위대한 수입이 되는 것이고

초막에 살고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궁궐에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난 그걸 깨닫지 못했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짧고도 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에서 스펙이 중요한가?  (0) 2010/08/23
하나님을 보는 법, 예수님을 보는 법  (0) 2010/08/20
난 그걸 알지 못했다  (0) 2010/08/19
예수님의 장애물  (1) 2010/07/28
'인생의 바닥'을 치고 보니  (2) 2010/07/01
교육과 학위  (0) 2010/05/21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A North Korean soldier holding a pair of binoculars looks south on the north side of the truce village of Panmunjom in the demilitarised zone separating the two Koreas in Paju, about 55 km (34 miles) north of Seoul, August 11, 2010. South Korea vowed to respond firmly to more provocations by Pyongyang after the North fired a barrage of artillery rounds near their tense maritime border, but analysts played down the prospect of combat. REUTERS/Jo Yong-Hak (SOUTH KOREA - Tags: MILITARY POLITICS)

한반도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국제사회의 상황도 좋지 않다. 곳곳에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고 각종 자연재해로 전 세계가 혼동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쁘기는 한데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고 있다. 뭔가 큰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 그저 살던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소선지서의 첫 예언서인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지금의 한반도 상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평범한 목동이었던 아모스는 북왕국(이스라엘)의 부강함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북왕국은 여로보암2세 시절이었는데 경제적으로 풍성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많았던 겉보기에는 괜찮은 나라였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화려한 예배와 복에만 집중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이방신을 섬기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들의 경제적 풍요함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북왕국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하나님은 예언자 교단(길드)에 속하지 않은 평범한 아모스를 통해 "너희가 벌이는 절기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모스 521-22).

왜 그런가. 북왕국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집중해 하나님을 마치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모시는 듯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가. 기복신앙으로 가득차 있다. 교회 건물은 점점 화려해지고 예배도 초현대식으로 엄청난 시설 안에서 드려지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간절함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교회로 인해 사회에 공의와 정의가 침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엄청나게 많은 문제가 한국 교회에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를 정화할 능력이 한국 교회에는 없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인 옥한흠 목사도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이 없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회의 권세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부정직과 사기가 너무나 팽배해 있다. 이는 아모스 시대의 북왕국과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은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무너지도록 하셨다. 앗시리아는 혐오스러운 짓을 일삼는 나라였다. 앗시리아는 오늘날의 북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앗시리아도 조만간 망했지만 일단은 정신을 못 차리는 북왕국을 손을 보고 망했다.

여러 정황을 보고 성경의 역사를 본다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려는 현재의 시도는 당연한 듯해 보인다. 천안함 사건이 이미 터졌지만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또 터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반도에 더 큰 분쟁(나아가서는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측발의 상황인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전기, 전자 시스템을 일순간에 정지시키는 '전자장치를 무력화하는 전자기(EMP: Electro Magnetic Pulse)'을 개발해 전면전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다. <관련 기사: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68026 >

해결점이 있는가. 물론 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아모스 54)." 회개하는 것이다. 한국은 사회 및 교회 자정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전자장치를 무력화하는 전자기탄'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 찾고 그의 구하심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을 찾고 회개가 이뤄지면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뜨거운 예배가 교회에서 다시 일어난다. 사회의 정의가 회복된다. 뜨거운 예배와 사회의 정의는 우리의 노력이 아닌, 회개로부터 시작한다. 회개로 인한 예배 회복과 사회 정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한국은 점점 위험한 위치로 갈 수도 있다. 누구 탓 할 것도 없다. 지금 나부터 회개하고 나부터 주님을 찾는 기도를 해야 한다. 때가 급하기 때문이다. [밝은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4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장애물[LA중앙일보]
박병기/Jesusinculture.com 운영자
기사입력: 07.20.10 16:26
사람들은 왜 돈 명예 힘을 추구할까. 이러한 질문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던져봤을 법한 것이다. 돈 명예 힘 자체가 대단히 좋다기보다는 그 결과가 너무 달콤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3가지 모두 또는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내 자존감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존경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하면서도 자신을 세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생을 떠나면서 자신의 책을 절판해달라는 그의 부탁은 많은 사람이 그의 책을 소유하고 싶게 만들었다. 사람의 심성에는 낮아지는 자에게 끌리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예수님은 돈 명예 힘을 모두 포기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누린 분이기에 많은 사람이 2000년 동안 추종을 했다. 오늘날 의사가 어떤 사람의 불치병을 고치면 당장 엄청나게 유명해져 거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이 추종했지만 이것을 명예와 힘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날 어떤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이렇게 추종자가 많다면 이를 반드시 자신의 명예와 힘으로 '현금화'하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달콤한 유혹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선택했다. 얼마나 초라한 일인가.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진 이가 자신을 세우기 위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그래서 예수의 추종자가 되기로 했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을 기록한 복음서를 믿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 세상에 와서 많은 사람을 고치고 가르치고 선교했음을 믿는다. 그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시려는 행위임을 믿는다. 그런데 만약 수억 분의 일(그 가능성을 믿지는 않지만)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가정할지라도 예수님은 내 삶에서 가장 쫓아갈만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돈 명예 힘을 모두 내려놓은 법정스님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고 '학위'를 내려놓고 선교사가 된 이용규 선교사 이런 분들보다 더욱 큰 것을 내려놓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인 예수님은 추종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분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의 정신을 망각하고 그의 뜻을 저버리고 살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돈 명예 힘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곳이고 주도권 싸움이 한창이다. 누구를 손가락질 하랴. 내 자신이 그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그렇기에 내 주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보고 싶다는 사람이 속속들이 나오지 않고 '예수쟁이가 저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 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자랑하고 내놓기가 쉽지 않다. 나로 인해 가려진 예수님. 그의 추종자들로 인해 가려진 예수님. 그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데 장애물이 너무 많다. 나는 여러 장애물 중에 작은 하나다. 예수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짧고도 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보는 법, 예수님을 보는 법  (0) 2010/08/20
난 그걸 알지 못했다  (0) 2010/08/19
예수님의 장애물  (1) 2010/07/28
'인생의 바닥'을 치고 보니  (2) 2010/07/01
교육과 학위  (0) 2010/05/21
10번의 칭찬  (2) 2010/05/16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p&g
    2010/07/30 07:3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꼭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깊이 있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탈봇 신학대학원의 교수이자 John Hick의 제자인 Dr. Craig가 독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모아둔 곳.

http://www.reasonablefaith.org/site/PageServer?pagename=q_and_a_archive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jesusinculture.com/trackback/30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문화 속에 있는 예수(Christ in Culture)를 주관점으로 묵상 내용과 생각을 나눕니다. Since 2006/01 (http://blog.daum.net/bbjjp) by 밝은터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305)
후원 (1)
운영자 소개 (1)
텔레비전 (12)
영화 (21)
음악 (10)
유명인 (26)
패션 (2)
스포츠 (62)
예술 (1)
게임 (3)
광고 (1)
안티 기독 (1)
엔터테인먼트 일반 (6)
문화 행사 (2)
仁터넷 (21)
Re-formation (38)
새벽 생각 (2)
짧고도 긴 생각 (69)
링크 (14)
사진으로 보는 세상 (3)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