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9장과 30장을 읽어보면 신명기 전체에서 흐르는 주제인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최근 제 두 자녀와 신명기 30장에 대해 나눔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네 온 마음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물어보았습니다. 역시 재미나게 노는 것이었고, 그 중에 비디오 게임이 있었습니다. 공놀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한다고 했습니다.

Nico
Nico by Ian Muttoo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이고자 하는 것은 나를 좀 봐라!” “나에게 순종 좀 해라!” “내가 너희를 정말 사랑한다!”입니다.

우리가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정도로 정성을 다해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축구 월드컵이 시작하면 온 나라가 그 경기에 집중합니다. 밤 잠을 설치고 경기를 봅니다. 온 맘을 다해 한국을 응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정도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을 해봅니다.

Goal!
Goal! by gabrielsond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꼬박꼬박 일은 하고 TV도 보고 다른 일은 열심을 다하는 데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더 알려는 노력은 뒷전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남는 시간과 푼돈을 받는 분으로 착각을 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역시 그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 없이 머리의 노력만으로는 그를 순종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294절을 보면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남은 단순히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의 섭리가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 네이버 뉴스 카데고리 ..
현재 네이버 뉴스 카데고리 .. by Seokzzang Yun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포털 사이트에는 매순간 검색어 순위가 공개됩니다. 검색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인물에 대한 관심입니다. 관심을 가져야 그 인물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너무 좋으면 만나러 가려고 하겠죠. 골수팬이면 팬클럽에도 가입하겠죠.

하나님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먼저, 궁금함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어떤 분인지 알아봐야 하고, 그를 만나고자 노력을 해야 하고, 그가 만나주기를 바라는 게 필요합니다.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임(교회 등)에 가입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왜 창조주는 인간과 계속 관계를 맺고 가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부모의 마음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자녀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때 더욱 기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모는 뛰어난 자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고 사랑하는 자녀를 원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부모는 기쁨을 누립니다. 부모가 기쁘면 자녀도 기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삶을 부모와 자식간의 삶에서 철저하게 경험하면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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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밖의 영성

2009/11/29 14:50


2009년 11월25일자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에 쓴 칼럼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크기의 칼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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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tted star dress design | fashion portrait
knitted star dress design | fashion portrait by Adam Foster | Codefor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유대인이 구약을 읽는 경우와 21세기를 사는 크리스천이 구약을 읽을 때는 다른 관점에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기 때문에 구약을 여전히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과 저주의 글은 유대인들에게는 피부에 와닿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한 설교 내용은 문자 그대로 그들에게 와닿기 떄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약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해서 하나님의 온갖 기적을 지켜봤고 또 하나님이 흩어놓아서 전 세계로 흩어진 민족이기에 구약의 말씀이 그대로 역사 속에서 실행에 옮겨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성경이지만 그들은 신명기 28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다른 관점으로 읽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믿기 때문에 신명기 28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성경이지만 유대인은 문자 그대로 볼 수 있고 크리스천은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뜻으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다이내믹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서도 읽는 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게 그런 말입니다.

하지만 공통된 해석은 있습니다. 바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다른 신을 섬길 때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만든 것은 아닌지.

하나님은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과 관심과 구원에 대한 증표로 예수의 몸으로 직접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도록 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과 관심과 구원을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명확하지 않고 희미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인가 긴가민가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해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의 구원자이고 사랑의 화신임을 명확하게 보이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다시 하나님을 찾아나서서 긴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을 만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 긴가민가하는 상황이 됩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믿다가도 나중에는 긴가민가해서 다른 신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합니다.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하나님의 계명도 무시하는 게 당연합니다.

모세는 따라서 신명기 27장과 28장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이러한 저주를 받는다고 강조해서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꼭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화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티모시 프릭 (미지북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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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사는 크리스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에 대한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오면서 그를 믿는 게 쉽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가 신화이고 예수는 성경에 나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연구서가 나오는 이유는 왜 일까요? 그만큼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이슬람도 그렇고 다른 종교도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종교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이를 인내하고 지켜보심을 예수를 통해 보이셨습니다. 유대인은 신명기 27장과 28장을 문자 그대로 믿기에 계명을 지키는 민족이 되었고, 이슬람도 비슷합니다. 이들이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게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없다고 하면 신명기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계명을 지키고 자신을 바라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예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익숙한 상황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신명기 27장과 28장을 볼 때는 그가 이런 징계를 내리는 분이지만 예수를 통해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셨음을, 그의 무한한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847절에 나오는 표현처럼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움으로 그를 섬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예수입니다.

THE OLD MILL RUN -- A Boys Day of Adventure in Old Japan
THE OLD MILL RUN -- A Boys Day of Adventure in Old Japan by Okinawa Sob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참 쉽죠 잉~”이라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쉽게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보내신 선교사입니다. 복음은 복잡하고 계명을 지키고 선한 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한 존재를 향해 그를 인정하고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하나님을 정확히 보게 했습니다.

쉽게 받은 것이기에 함부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쉽다는 것, 그것이 쉽게 보여도 쉽지는 않습니다. 나의 노력만으로 쉽게 믿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너무 쉽고 싸게 보이면 붙잡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옷을 살 때 왠지 싸게 보이고 구입하기 쉽게 보이면 귀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패션을 생각할 때 비싸면 왠지 대단해 보이고 좋아보입니다. 싼 가격으로 옷이나 장신구를 구입해 고급스럽게 보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옷을 입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예수의 은혜가 마치 값싼 은혜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을 보고 별 노력 없이 구원을 얻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제공한 이는 쉽게 받으라고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너무 복잡하게 받아들이니까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싼 옷을 비싼 옷처럼 입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값싼 은혜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고급스러운 은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정말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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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케이도 (Max Lucado) / 목사
출생 1955년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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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x Lucado (맥스 루케이도 글)

Does Jesus have anything to say about dealing with difficult relatives? Is there an example of Jesus bringing peace to a painful family? Yes, there is. (예수님은 곤란하게 하는 친척을 다루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예수님이 고통 받는 가족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예는 있을까? 물론 있습니다.)

His own. (바로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It may surprise you to know that Jesus had a difficult family. If your family doesn’t appreciate you, take heart, neither did Jesus’.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가족/친척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당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까? 예수님도 그런 취급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His family … went to get him because they thought he was out of his mind” (Mark 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마가복음 3:21)

Jesus’ siblings thought their brother was a lunatic. They weren’t proud—they were embarrassed!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랑해 하기는커녕 당황해했습니다.)

It’s worth noting that he didn’t try to control his family’s behavior, nor did he let their behavior control his. He didn’t demand that they agree with him. He didn’t sulk when they insulted him. He didn’t make it his mission to try to please them.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는 가족이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자신의 생각에 억지로 동의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조롱해도 게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미션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Each of us has a fantasy that our family will be like the Waltons, an expectation that our dearest friends will be our next of kin. Jesus didn’t have that expectation. Look how he defined his family: “My true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are those who do what God wants” (Mark 3:35). (우리는 우리 가족이 마치 월튼가네 사람들처럼 가장 귀한 친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방어를 하는지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5)")

When Jesus’ brothers didn’t share his convictions, he didn’t try to force them. He recognized that his spiritual family could provide what his physical family didn’t. If Jesus himself couldn’t force his family to share his convictions, what makes you think you can force yours? (예수님의 형제가 예수님의 신념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가족은 육적인 가족이 제공하지 못한 것을 제공할 것임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친척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그것을 강요하겠습니까?)

Having your family’s approval is desirable but not necessary for happiness and not always possible. Jesus did not let the difficult dynamic of his family overshadow his call from God. And because he didn’t, this chapter has a happy ending.
What happened to Jesus’ family? (가족의 인정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항상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항상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가족은 곤란한 상황이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념 위에 그림자 지우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끝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Mine with me a golden nugget hidden in a vein of the Book of Acts. “Then [the disciples] went back to Jerusalem from the Mount of Olives.… They all continued praying together with some women, including Mary the mother of Jesus, and Jesus’ brothers” (Acts 1:12, 14, emphasis added).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행전 1:12, 14)

What a change! The ones who mocked him now worship him. The ones who pitied him now pray for him. What if Jesus had disowned them? Or worse still, what if he’d suffocated his family with his demand for change? (변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를 조롱했던 이들이 그를 예배했습니다. 그를 측은히 여겼던 이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변화를 강제로 요구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He didn’t. He instead gave them space, time, and grace. And because he did, they changed. How much did they change? One brother became an apostle (Gal. 1:19) and others became missionaries (1 Cor. 9:5).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 그들이 생각할 공간, 시간, 은혜를 허락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변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변했나요? 동생은 사도가 됐으며 다른 형제는 선교사가 됐습니다. (고린도전서 9:5)

So don’t lose heart. God still changes families. (그는 포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변화시킵니다.)

From He Still Moves Stones

Copyright (Thomas Nelson, 1999) Max Luc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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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6 05:4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2. 스만이
    2009/11/27 07:0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위로도 되고 격려도 되는 훌륭한 글과 번역입니다. 가족에게도 강요할 수 없죠..감사합니다.


제임스 낙트웨이 사진 기자는 전 세계 전쟁과 가난을 쫓아다니며 보도 사진을 찍는 종군기자입니다. 최근 그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회가 점점 엔터테인먼트와 유행에만 민감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와 유행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이 두 분야가 사람들의 다른 관심사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와 사람들의 만남의 자리는 온통 엔터테인먼트로 가득합니다. 놀이와 유행이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이 놀이를 즐길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마저 송두리째 빼앗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방송 중 그가 했던 말을 소개합니다.


언론매체들로 하여금 좀 더 결정적이고 중요한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그건...수월했던 적도 없지만, 지난 몇 년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가면 갈수록 오락과 유행에 사로잡혀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주들은 자기들의 상품 이미지가 (어려운 이웃들의) 비극적인 사진 옆에 전시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네 상품의 판매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죠.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모이는 모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속한 단체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방문하는 인터넷 신문은 어떻습니까. 방송은 어떻습니까. 온통 엔터테인먼트로만 가득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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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 군 하늘나라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진짜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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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이란 말에는 평화도 있지만 정의, 질서, 조화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샬롬 커뮤니티(샬롬 공동체)를 꿈꾸며라고 달아보았습니다. 이 글은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 8면에 지난 2009년 11월4일 실렸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좀 더 큰 크기로 기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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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ow street; Mdina, Malta
Narrow street; Mdina, Malta by foxypar4 저작자 표시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가 아직은 어린 아이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른이지만 성숙이 교회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성숙 단계로 들어간 교회라고 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 믿음과 인내로 여러 교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고 있습니다 (살후 1:4).

성숙한 교회에서는 바울이 칭찬을 많이 하고 덕담을 자주 합니다. 물론 덕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교회가 성숙해질 있도록 권면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교회에 대한 권면과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다 문제가 있고, 사람이 모인 곳이라 크고 작은 문제는 계속 터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는 교회의 상황이 여기서 핵심 포인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말이 같지만 상황을 알고 읽으면 다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교회마다 상황과 사정이 다르고 바울의 책망과 권면도 다른데 역시 그가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심에 대한 소개가 핵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낮아짐) 부활에 관한 내용부터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리스도의 심판을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아야하겠기에 바울이 사랑장(고린도전서 13) 포함한 같고, 빌립보 교회는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메시지가 필요했던 같습니다. 이단 문제로 골치 아팠던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함에 대한 내용이 필요했고, 재림의 임박성을 너무 열렬히 기대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그의 오심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성숙한 교회인가 성숙하지 않은 교회인가에 따라 편지 내용이 크게 다름을 있습니다. 성숙함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미성숙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를 읽는 시점에 그 교회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고린도 교회, 골로새 교회는 질서가 잡혀야 했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고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양념을 넣듯이 했습니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은혜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했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다른 부분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거론된 교회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교회들입니다.

로마서는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게 다뤄졌기에 편지의 비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위에 소개된 바울의 편지글은 개인차원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는 , 따라서 내용을 21세기의 기독교 리더가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며 공동체적인 해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상황에 맞는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내용인 같습니다.

설교자는 교회의 상황에 맞는 본문을 골라 설교를 해야하고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듣는 아니라 공동체적인 해석을 하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있을 것으로 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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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노승환) / 국내가수
출생 1972년 10월 10일
신체 키180cm, 체중70kg
팬카페 힙합뮤지sean을위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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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 신명기 26장에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신명기 26장에도 나타납니다.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레위인, 외국인, 고아, 미망인에게 수입의 일정량을 나누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십일조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사실 신약과 구약에는 이웃에게 소득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나옵니다. 이웃에게 나누자고 하면 공산주의라고 폄하하며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쳤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텐데 요즘 한국이든 미국이든 소득을 이웃과 나누자고 하면 좋아하는 기독교 리더가 많지 않습니다.

말로는 나누자고 하지만 실제 그러한 법안이 상정되거나 시스템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려고 하면 공산주의라고 싫어합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없는 분들이 소득을 나누자는 것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일부분만 너무 강조한 탓입니다. 대형교회의 경우 점점 부자가 되어 가는데 이웃에 대한 씀씀이는 박한 게 사실입니다. 헌금 대부분이 교회 시스템 유지에 사용되는 게 현실입니다.

하나님께는 돈과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는게 자연스러운데 이웃에게는 선뜻 그렇게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정혜영 / 탤런트
출생 1973년 12월 14일
신체
팬카페 정혜영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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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 / 국내가수
출생 1967년 8월 14일
신체 키186cm, 체중70kg
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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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들어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힙합 그룹 지누션의 멤버인 션과 그의 아내인 정혜영 씨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CF 출연료 1억을 선뜻 내놓고 가수 김장훈 씨도 자신의 재산을 고아원에 끊임없이 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니 세상도 박수를 보냅니다. ‘개독교라는 말이 쑥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실천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돈으로 시간으로 십일조를 하게 하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십일조도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션, 정혜영 부부, 김장훈 씨와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나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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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느낌님의 믹시

    2009/11/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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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티비에 션부부가 나오더군요. 그런 이웃 사랑은 자기 부인 사랑으로부터 했다는 데서 더 진가가 발휘되는 것 같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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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밝은터
    2009/11/1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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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본 받고 싶은 부부입니다. 감사합니다.


미주 중앙일보 2009년 10월20일자 글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조금 더 큰 크기의 기사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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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만이
    2009/11/1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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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낮아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을 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신명기 25장의 규정은 직접적인 적용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악인에게 40대 태형을 준다든가, 형제가 사망하면 그 아내를 다른 형제가 데리고 산다든가, 두 사람이 싸우는데 아내가 상대 사람의 음낭을 잡으면 손을 찍는다든가 하는 것은 오늘날 적용하기 어려운 규정들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나타난 정신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질서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세밀하게 준비한 규정들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한 분인지 알게 됩니다. 이곳의 율법들은 모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기초를 위한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3:24).

21세기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기 나오는 율법의 많은 부분을 따를 경우 무리가 생기게 됩니다. 상황에 맞게 변형하는 상황화가 필요하겠죠. 법의 정신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초등학문 또는 기초는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녔을 때 글렌 스태슨 윤리학과 교수님이 해준 말이 기억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야의 기초 과목을 들을 필요 없이 상위 과목을 들으면 졸업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학교 측은 그 학생이 여전히 기초 과목을 들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규정의 원리(principle)를 적용해야지 규정을 그대로 율법주의적(legalism)으로 적용하면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논쟁 끝에 그 학생은 기초 과목을 듣지 않고 상위 과목을 곧바로 듣고 졸업을 할 수 있었고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법을 해석하는 변호사, 검사, 판사가 있는 것처럼 법은 멈춰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맞게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 원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인에게 태형 40대를 주는 것은 악한 행동에 대해 뉘우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여인을 남편의 형제가 돌보게 하는 것은 자칫 방황할 수 있는 여성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법 정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호의 개념이 강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가족 재산의 보호라는 말도 하더군요.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질서에 대한 것입니다. 질서는 따라서 억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사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질서가 아닙니다.

집행자
감독 최진호 (2009 / 한국)
출연 조재현, 윤계상, 박인환, 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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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행자로 인해 요즘 사형제도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에도 이러한 주제가 다뤄지고 있죠.

법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적절한 형벌이 내려져야 질서가 잡힙니다. 그 질서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하고 죄를 짓는 죄인에게도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은 오랫동안 감옥에서 살게 됩니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에서 매튜라는 남자는 두 연인의 데이트 현장에서 강간을 하고 살인까지 한 극악한 사형수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추종자이고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형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는 사형을 앞두고도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헬렌 수녀는 사형될 때까지 도와줍니다.


데드 맨 워킹
감독 팀 로빈스 (1995 / 미국)
출연 숀 펜, 수잔 서랜든, 조안 글로버, 레노어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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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헬렌 수녀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을 했지만 헬렌 수녀는 수모를 감당하고도 매튜를 끝까지 도왔습니다. 질서를 무너뜨린 자였지만 감방에서 강제로라도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자였기에 헬렌 수녀님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질서에 은혜와 자유가 있으면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지만 은혜와 자유가 없으면 그것은 사망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디트로히 본회퍼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에버하르트 베트게 (복있는사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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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신학자들이 질서를 위해 히틀러의 정치에 토를 달지 못햇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히틀러의 새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신자였던 안중근은 왜 암살을 시도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의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은혜와 자유가 없는 질서에 대해 문제 제시를 합니다. 질서 위에 은혜와 자유가 있으면 그것은 값진 일입니다. 헬렌 수녀님은 의미있는 일을 한 분입니다.

다시 신명기에 나오는 질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25장의 질서에 은혜와 자유가 있나 생각해 봅니다. 의인에게 은혜와 자유가 부여되고 악인에게 죄의 대가를 치르고 죄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은혜와 자유가 있습니다. 질서 밖으로 빠져나와 혼란스러울 뻔 했던 남편 잃은 여자에게 은혜와 자유가 주어지며 음낭을 잡혀 성기능을 상실할 수 있는 남자에게 은혜와 자유가 있습니다. 죄를 졌지만 손을 찍힌 여인에게는 은혜와 자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질서는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형 제도는 사형수에게는 은혜와 자유를 빼앗는 질서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 국외정치인
출생 1889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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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히틀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은혜와 자유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들도 질서 위에서 은혜와 질서를 누려야 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의 은혜와 자유를 빼앗았던 인물들이었기에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엄청난 파워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나영이를 괴롭힌 조두순은 그래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합니다. 그는 12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나온 후 다른 어린이들의 은혜와 자유를 빼앗을 가능성이 큰 사람입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잠재적인 피해자입니다. 질서(감옥) 안에서 그도 은혜와 자유를 체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교화작업이 이뤄져야 하고 그를 품을 헬렌 수녀님과 같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에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해자의 파워나 영향력이 엄청나다면 예외적으로 그들에게서 은혜와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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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1/0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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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서 ,율법, 윤리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고 그것을 잘해석하고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조금은 덜 다치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사람을 귀히여기고 사랑하며 존중하며 아끼고 살아야 되는지 알기쉽게 분명히 말씀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2009/11/09 18:03
      댓글 주소 수정/삭제
      사람을 귀히 여기시려는 마음, 본받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질서를 강조했다고 하면 빌립보 교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이야기했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자유가 강조됩니다. 4 교회에 편지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파악할 있습니다. 바로 질서, 은혜, 자유입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 은혜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구원으로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골로새 교회는 분열과 이방신 숭배, 이단 출몰로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질서를 먼저 잡으려고 했던 바울은 주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교회입니다. 신앙 성숙을 위해 계속 은혜를 강조하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 바울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장황하게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활동한 내용을 설명한 바울은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에 묶여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로 인해 이들은 율법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실 율법은 초등학문이 맞습니다. 성령은 고등학문이고 율법은 초등학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교회가 숨이 막혀 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점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에 필요한 메시지가 갈라디아서 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 초등학문은 고등학문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갈라디아서 325).

하나님의 질서는 기초가 되고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가 서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기초는 잡혀 있다고 있습니다. 위에 자유를 세워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너무 율법주의적인 교회가 있다면 갈라디아서를 해석해서 강해로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은 율법을 무시하자는 아니라 율법의 기초 위에 은혜와 자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야 세상과도 올바른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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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The Cross
Through The Cross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끼고 기쁘게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인 교회라 사도 바울의 특별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는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세운 교회로 보여집니다. 가지 다른 상황을 보면서 그가 어떤 관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문제가 가득한 혼란의 교회(고린도 교회) 향해서 그는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더욱 깊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였기에  일반적인 교리와 권면이 주를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깎아내리며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울이 세운 교회였더라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같은 강한 어조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신학교 교수가 모르는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유대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를 모두 혼합했다고 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실제 골로새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엿보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런 지경이면 그는 감정이 섞인 투로, 길고 장황하게 글을 썼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그렇게 썼다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점잖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같습니다.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경을 읽을 성경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교류됐던 편지글을 읽는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멘토였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내가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더라면 어떻께 썼을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오래전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바울) 읽는 (골로새 교회 교인) 그리고 글을 엿보는(?) (성경 독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재범 (박재범) / 국내가수
출생 1987년 4월 25일
신체 키174cm, 체중60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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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M 재범 군을 생각합니다. 마이스페이스라는 블로그에 친구와 사적으로 대화 나눈 어렸을 때의 글에 한국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것은 재범 군이 썼던 일종의 전자 편지 글은 친구에게 쓰는  사적인 글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미성숙했던 10 중반의 어린 아이가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읽도록 사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인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인 편지라고 있습니다. 편지글이 정경이 되어 성경이 됐을 우리는 사적인 편지글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마구마구 잡아넣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역사적인 기독교 선교사가 인물입니다. 그의 미성숙했을 때의 행동이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로서 선교일을 있었습니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적인 편지글을 성경 66권에 넣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할 있는 근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교회에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그대로 옮겨서 적용할 경우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진리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우리 교회에 해석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글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당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뜻을 헤아리면서 해석한 내용을 전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자유케하지 않지만 진리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 , 행동을 갖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매도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미성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어 그가 사도로서 일을 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지적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그의 회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의 과오가 용서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 있던 사도가 사적인 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실(facts) 보던 눈에서 진실(truths)이 발견될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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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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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판단 받을 때도 있지만 잘못이 없는데도 오해를 사서 판단될 때가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모함이나 헐뜯는 것으로 오해가 될 때면 억울할 때가 있다. 이상하게 교회에서 그런 일이 너무 자주 발생한다.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설명할 적절한 시기가 오거나 하나님 앞에서 "넌 그것에 대해 잘못이 없다"라는 판정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해하는 사람은 나의 설명을 갖고 또 오해거리를 양산해내기 때문이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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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단군왕검상
천안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단군왕검상 by ForestMind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최근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표현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 사탄의 방법으로 전하는가"였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비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너무 예의 없이 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강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등의 예의 없는 전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탄적인 방법으로 전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 그 방법은 진리와 친구여야 합니다. 내용은 진리인데 전하는 방법이 진상이면 진리는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오랫동안 진리를 진리답게 전하질 못했습니다. 물론 진리를 진리답게 전했던 선배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대세는 무례함입니다. 이제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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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varia Oberstdorf: sun rays spread  10.2592.46
Bavaria Oberstdorf: sun rays spread 10.2592.46 by Juergen Kurlvink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나는 ‘참교육’과 그것이 사회와 국가에 미치는 중요성,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는 교육을 이야기했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빠뜨린다면 젊은이를 교육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교육의 근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학생을 사랑하여 그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습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가정을 사랑하여 부모가 즐거이 책임을 다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를 사랑하여 젊은이를 교육하고 훈련시켜 그들로 잠재력을 십분 살리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소중한 자들을 그분이 하시듯 보살피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길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생들이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교사의 사랑이다. 교사가 학생을 사랑하면 학생의 학습 욕구가 커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며, 학습을 방해하는 과거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 (주: 그전에 교사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교사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참교육을 하기 어렵다. 적절한 위치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최상의 교육을 낳는 핵심 요소는 탁월해지려는 열망도, 최선의 노력이나 최고의 교육 방법도 아니라 단순한 이 한 가지임을 잊지 말자. 바로 사랑!

벤 토레이/예수원 삼수령센터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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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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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있을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저작자 표시비영리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같습니다. 118절에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땅에서는 낮아질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것을 꼭꼭 집어주는 조금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공감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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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365: SILENCE = DEATH
293/365: SILENCE = DEATH by malik ml williams [flickr-ing in and out] 저작자 표시비영리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 글을 쓰는 밝은터에게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하나님의 성품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주인공의 성품을 모른 채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면 전체 내용 파악을 하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 자유,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마음에 품고 성경을 읽을 때 오해가 덜 생깁니다.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은혜, 자유, 질서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강조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질서를 많이 강조하는 듯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니까 그런 어조로 편지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 은혜와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와 자유가 적절하게 포함됩니다.

신명기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질서가 강조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예수님을 초대하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명기 설교의 상황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은혜와 자유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숨겨진(?)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 무서운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되면 메시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신명기 24장에는 여러 규정이 나옵니다. 이혼은 제한적으로 허용됐지만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 원래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일이었으며, 갓 결혼한 사람은 군복무에서 제외되며, 유괴범은 사형에 처하며, 문둥병에 따르는 의식이 있어야 하며, 적시에 품삯을 지불해줘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둬야 할 이삭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을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그대로 적용하면 어떨까요?

이 규정에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입니다. 그리고 질서입니다. 첫째 남편은 여자에게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혼증서를 써줬습니다. 그리고 둘째 남편도 비슷한 사유로 이혼증서를 썼거나 사망을 했는데 이 여자가 첫 번째 남편에게 가는 것은 가증스러운(abhorrent) 일이라고 합니다. 21세기의 상황에서는 참으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가증스러운 것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를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하는데 첫 번째는 남편이 여자가 싫어서 이혼증서를 써줬는데 다시 맞아들이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가 다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일로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여자에 대한 보호입니다. 여자가 함부로 다뤄지지 않도록 하는 보호법으로 보입니다. 정결하지 않은 여자는 돌로 치라는 규정이 당시에 있었기에 자칫 잘못 그런 여자로 몰려 죽음을 당할 수 있기에 보호하려는 규정으로 보입니다.

갓 결혼한 사람이 군복무에서 제외되는 것은 지금 적용해도 좋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유괴범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조금 과하지만 유괴범이 법의 심판을 확실히 받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머지 품삯을 적시에 주는 것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남기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계속 적용되어야 할 성경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유, 질서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연합을 꾀하며, 약자를 보호합니다. 또한 죄에 대해 은혜의 손길을 뻗칩니다. 교도소에 있는 분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칠 때 그들에 대해 은혜, 자유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을 당장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긍휼하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장동건3
장동건3 by Raymond.Kang 저작자 표시비영리

배우 장동건과 고소영이 사귄다는 소식이 한국 시각으로 어젯밤 자정 직전에 터졌습니다. 갑자기 터진 것에 의아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혈서 사건과 연관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영 찜찜합니다. 과거 연예인들의 사건이 많은 정치, 사회적 사건을 묻히게 한 것을 보면 왠지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로 보면 장동건과 고소영은 사귀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보면 그 사귀는 것이 왠지 정치적으로 이용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우연히 그런 것일수도 있고, 진짜 정치적인 어떤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실을 볼 때 진실을 볼줄 아는 눈과 정보를 갖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실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허락하심입니다. 수많은 사건이 사실을 제공합니다. 그 사건들의 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의 틀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무시하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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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노끼
    2009/11/06 02:0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상황과 사실과 진실 어느것도 놓지 말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A Little Perspective
A Little Perspective by loswl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고린도전서 15장과 16(마지막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아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서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 예수는 그러한 심판을 통과해 부활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은 모든 논쟁의 정답을 주는 것입니다. 정답은 죽는 순간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찰나에 모든 게 결정이 납니다. 100m 달리기 선수가 10초 안에 달려야 하는 광속(?) 승부를 내듯이 죽음의 순간에 인생에서 우리가 쏟아놓았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후반부에 눈깜짝할 사이에 심판의 결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해결했다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또한 부활과 연관이 되고 부활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천국의 이미지를 갖도록 합니다 (15:49).

죽을 때 모든 승부의 결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견고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어도 죽음 앞에서는 그 이론이 무색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데 무슨 이론이 필요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온갖 혈기를 부리는 교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자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기본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15장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부활한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믿는 자도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후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크리스천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고 이에 대한 증인과 증거가 너무나 많기에(고전 15:3-9)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의 도덕성을 믿는 게 아니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길을 만드셨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이 도덕으로는 율법으로는 도저히 천국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이러한 은혜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에 대한 강력한 징표로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신 것이고 그 사건은 우리의 죄를 속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입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는 혼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미래에 우리에게 닥쳐올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전서 연재를 마치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연재였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고린도교회는 교회를 시작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미국과 한국도 교회를 시작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점점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과 부활을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1세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 말에 위로가 됐을 것 같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알려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다른 이들도 함께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은혜와 자유를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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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6 02:0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 2009/11/06 23:59
      댓글 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스만이님..그리고 주님.

남성의 눈으로만 성경과 불경을 풀고, 남성 중심으로만 교단을 지탱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젠 종교도 변할 차례다. 대한성공회에는 여성 사제가 있고 미국성공회에는 여성 대주교가 있다. 원불교에선 여성 교정원장(조계종 총무원장에 해당)도 나왔었다. 지난주 독일에선 개신교협의회장에 처음으로 여성 목사가 뽑혔다. 한쪽 다리로 달릴 건가, 아니면 두 다리로 달릴 건가. 그건 ‘21세기 종교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관련 글: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3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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